설교

‘성령’=‘행동’ 자체

    * 성령을 어떤 추상적인 ‘덩어리’로 여기는 막연한 전제가 있기 마련이나 그 영의 실체는 ‘행동’ 자체임을 주석. 우선 다음 본문을 유념할 것이다. 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ㅡ(롬 8:13-14)고 했을때, 14절을 이렇게 번역하면 훨씬 더 좋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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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버지를 ‘아는’(ἔγνω) 원리

    * 이글은 우리가 ‘아버지를 안다’고 했을때 그 ‘아는’ 방식에 관해 쓴 글이다.     사진으로 보니 제법 광택이 나지만 실물은 볼품없이 낡은 30-40년이 족히 넘은 시계다. 30여 년 전에 아버지께서 새 시계를 차면서 이걸 금고에 재워 두는 것을 내가 어느 날 보고서는, “아버지 그 시계 저 주세요.” 했더니 어린 나에게 선뜻 내줄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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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믿는 신으로 과연 구원 받을까?

    내가 청년 때에 예수님을 처음 영접하고 나서 여러 변화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당시 홍대 근처에서 살고 있었는데 홍대 앞에서 강남역에 갈 때에는 항상 47번 좌석버스를 타고 다녔다. 이 버스가 얼마나 드물게 오는 지, 47분 만에 한 번 오기 때문에 47번 버스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예수님 믿고 생긴 변화란, 집을 나서면서부터 ‘하나님, 버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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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πίστις)이 신뢰(πεποίθησιν)와 결별하는 과정

    믿음(πίστις)과 신뢰(πεποίθησιν)는 본래 뿌리가 같은 어휘다. 그런데 이 ‘믿음’이 ‘신뢰’라는 뿌리에서 완전히 독립하여 결별하는 과정이 보전된 본문이 있다. 그 과정에는 ‘믿음’이 보다 본질적인 명사로 독립하여 ‘칭의’ 라는 개념에 다다르는 과정이 담겼기에 꽤 중요한 장면일 수 있다. 그 장면은 다음 본문에 담겨 있다.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①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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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흔일곱 번(77) 용서해야 하나, 일흔 번씩 일곱 번(490) 용서해야 하나

이 글은 희년의 본질을 밝히는 글이다. 부활절의 성립은 유월절에 근간을 두고 있지만, 궁극적 실천은 희년(禧年)에 뿌리를 두고 있다. [희년의 범주와 근거]– 매매 된 토지 환원 (레 25:29-34)– 노예의 해방 (레 25:39-41, 47-54)– 부채 면제/ 채권, 채무의 소멸 (신 15:1-3; 레 25:35-37) [희년의 유래 및 취지]– 유배 시대 및 유배 끝에 작성된 사제문헌(P)– 빚으로 종 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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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족식이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이유

다른 복음서에서는 세족식이 없다. 세족식은 왜 요한복음에만 있을까? 본문: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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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왜 유교병(아르토스)을 사용했나?

    성만찬의 제정은 부활절과 직결되어 있다.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으로 들어가기 전 마지막 식사가 곧 성만찬으로서, 기독교 예전의 총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부활절(Easter)이라는 말 자체는 성경 용어는 아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오히려 이교적 양식에 기원을 두고 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는 이 날은 본디 3세기까지만 해도 파스카(πάσχα/ 유월절)로 불리며 기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c.f. 고전 5:7; 행 1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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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귀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고 한 이유

이 글은 공관복음에 기록된 예수께서 받으신 시험 가운데 한 가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시험이 무엇인지에 관하여 쓴 글이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는 본문은 원래 두 줄짜리 간단한 기록이었느나(막 1:12-13)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이에 대해 보다 길고 의미화 된 전승을 택하여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어인일인지 마태와 누가는 예수께서 받으셨다는 이 시험의 순서를 서로 다르게 진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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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인카네이션”(化肉)

    내가 가장 싫어 하는 용어는 <순종>이다. <순종>이라는 제목으로 나오는 책들을 혐오하고 그것을 공동구매 시키는 행위도 매우 혐오한다. 그러나 말씀의 영(令)이 있어 이 글을 남겨야겠다. 히브리서 10장 5절 이하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온다. “제사와 예물을 원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도다>…” 이것은 시편 40편 6절 이하를 인용한 것이다. 그런데 시편에는 정작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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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새 관점’으로 둔갑한 ‘헌 관점’

    이 글은 대부분의 칭의 논쟁에 있어 일체 간과되어 버린 전제 요소들(이를테면 히브리서 Πίστις의 배경)을 요약한 글이다. 우선 다음 표로 구성된 개요를 자세히 관찰하고, 부연 설명을 읽으면 좋다. 1) 유대교가 원래는 은혜의 종교였다는 사실은 (어떤 새로운 사실이 아니라) 어느 정도 구약에 관한 개론이 들어선 사람이라면 잘 알고 있을 것이다(구약에 관한 개론이 없는 학자가 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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