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의 ‘주기도문’은 마태와 어떻게 다른가

누가의 ‘주기도문’은 마태와 어떻게 다른가

 
 
이 글은 누가의 주기도문이 마태의 주기도문과 어떻게 다른지에 대해 정리한 글이다.

 

1) 주기도문은 부적인가?

얼마 전 미국 플로리다주 펜사콜라 시의회 회의장에서 어떤 자가 사탄을 소환하는 기도를 하자 주변에 있던 크리스천들이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기도문이란 이 같이 악령을 내쫓는 부적 내지 주문의 기능을 하는 기도문인가?

마태복음은 예전(liturgy)으로 쓰기에 더 적합한 정형을 이루고 있지만,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그 기도문의 유래를 밝히는데 주력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임을 우선 일러둔다. 이 글에서 그것을 요약할 것이다.

 

2) 세례 요한이 제자에게 가르쳐준 기도 Vs. 주기도문

마태복음의 주기도문 역시 기도를 가르치는 맥락에서 모범으로 제시된 기도문이지만 그것은 외식하는 기도와의 구별로서 제시되었다. 기도할 때 외식을 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 속에서 주기도문이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론하면서 자기네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구하는 과정에서 주기도문이 제시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적어도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마태복음에서 경계한) 외식하는 유대교의 기도와는 달랐다는 사실을 먼저 추정할 수 있다. 즉 세례 요한이 가르친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친 기도와 유대교 전통의 기도 사이에 끼어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세례 요한이 어떤 기도를 가르쳤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유대교 바리새인의 그 외식하는 기도가 어떤 식으로 구현되었는 지는 유추 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 내용적으로 송영(doxology)에 국한된 기도였을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속성에 대한 찬사가 주된 내용이었을 이 ‘위대한’ 기도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주로 행하여졌던 것이다. 예컨대 찬송가집에 수록된 찬송 중에서 ‘두 번 아멘’ 또는 ‘세 번 아멘’ 등의 찬송이 있다. 만일 일년 열두달을 그런 찬송만 부른다면 어찌될까? 찬송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뭔가 마음에 맺히는 게 없을 것 같다.

이에 비하면 세례 요한이 가르쳤다는 기도는 대중의 삶에 아주 밀접한 어떤 내용을 기도에 적용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와 같은 세례 요한의 ‘실제적인’ 기도보다도 한 층 진전된 기도가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인 것이다.

다음은 누가의 주기도문에 얽힌 컨텍스트와 마태복음에서의 컨텍스트를 비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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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시피 마태복음의 주기도문 가운데 상당량이 제거되는 바람에 누가의 주기도문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사실상 ‘일용할 양식’이 되고 말았다. ‘시험’과 ‘죄 사함’의 내용도 포함 돼 있지만 보다 실생활에 밀접한 문제, 곧 먹는 문제와 맞물려 있다.

마태복음에서 장착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와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거시적인 맥락, 즉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너에 대한 기도’와 그리고 ‘나에 대한 기도’로써 잡혔던 균형이 누가의 주기도문에서는 하루 일용한 양식의 먹거리에 대한 내용으로 압축된 셈이다.

세례 요한이 가르친 기도, 그리고 유대교적 기도와의 관계를 감안할 때 누가의 본문이 더 원본에 가까운 주기도문 본문이라 할 수 있다.

 

3) 마태의 주기도문 Vs. 누가의 주기도문

그렇지만 누가의 주기도문 컨텍스트는 참으로 창조적으로 구성되었다. 저 짤막한 주기도문 직후에 등장하는 내러티브와 교훈들은 그 주기도문에 대한 두 가지 보설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기도의 방법이다.

주기도문 직후에 등장하는 내러티브는 친구에게서 떡 빌리는 이야기다. 이야기인즉 얼마나 성가시게 구하였던지 친구라서 떡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성가시게 함으로 떡을 받게 되었다는 전언이다. 즉 응답을 받으려면 그 정도는 들들-볶아야 한다는 것일까? 이 내러티브 다음에는 마태복음과 공히 저 유명한 기도의 강령,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ㅡ’가 배치되어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그 강령이 마치 친구를 성가시게 한 그 내러티브의 귀결인 것만 같다.

둘째, 기도의 내용이다.

누가의 맥락에서는 무슨 내용을 기도의 제목으로 내놓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앞서 언급한 일.용.할. 양.식.의 그 구체적 내용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잇달아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생선과 알’이다. 이 ‘일용한 양식’은 상반된 상징 세트로 묶여 있다. 생선은 뱀, 알은 전갈과 함께.

이상한 것은 마태복음에서는 ‘떡(돌)과 생선(뱀)’으로 묶여 있던 것이 누가복음에 와서는 ‘생선과 알’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본 작업상 이에 대한 혼동이 있었던지, 누가복음 사본들 중에는 아예 ‘떡(돌), 생선(뱀), 알(전갈)’, 이렇게 세 개의 세트로 나오는 사본도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의 ‘떡과 생선’이 누가복음에 와서는 ‘생선과 알’로 변경된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서 ‘떡’은 그 앞선 내러티브, 즉 친구에게 꾸어오는 양식으로 이미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 ‘떡과 생선’세트였던 것을 누가는 ‘떡’을 위의 친구 내러티브로 올려버리고, 그러고서 남겨진 ‘생선’은 다른 상징 ‘알’과 묶어낸 것이다.

자 그렇다면 떡은 떡이요, 생선은 생선이라면, 대체 ‘알-전갈’은 어디서 튀어나온 상징일까? 누가가 대충 골라잡은 것일까? 그런 것이 아니다.

우선 ‘떡과 생선’은 유대교 사회에서 전통적이면서도 유서 깊은 상징이다. 떡은 이미 출애굽 광야 시절에 (하늘의) 신성한 양식의 전형이며(만나), 생선은 그 광야 노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과정에 그리워 하던 이집트식 먹거리다. 실상 메추라기로 대체되었지만, 훗날 전승에서는 일상 속 손쉬운 재료인 ‘생선’이 떡과 함께 유서 깊은 질료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수많은 식재료 가운데서 ‘오병이어’가 된 전거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ㅡ민수기 11:5

그러면 ‘알’은 대체 무엇일까?

 

4) 돌, 뱀, 전갈

‘떡, 생선, 알’과 묶인 부정의 세트 ‘돌, 뱀, 전갈’에 대한 우선적인 관찰이 있다.

돌은 당대에 떡을 굽는 과정에서 떡과 혼동하기 쉬운 도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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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사 돌이 떡과 같았던 것이다. 그런데 저 돌을 떡이라고 하면서 아들에게 주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냐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뱀은 아마도 물뱀이다. 물고기를 잡는 중에 자칫 뱀이 걸려들 수 있다. 물고기와 뱀은 필경 모양은 다르지만, 만일 물가에서 물고기와 뱀을 손으로 만져본다면 느낌이 비슷했을 것이다. 하지만 촉감은 유사하겠으나 물고기가 아니고 뱀인 것을 육안으로 보게 된다면 얼마나 놀랄까? 그런 것을 아들에게 주는 아버지는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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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으로 알과 전갈이다.

광야에 서식하는 흰색 전갈은 알과 헷갈린다고 한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혼동할 수도 있겠지만, 누가가 새롭게 채용한 이 알-전갈에는 다음과 같은 메타포가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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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ㅡ눅 13:6-9.

 
위 누가의 본문에서 보면 ‘거름’이라는 용어가 보인다. 직역하면 한 마디로 ‘똥’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 단어를 κόπριον(코프리온)이라고 읽는다. 그것은 마치 전갈, 즉 σκορπίον(스코르피온)의 음가와 유사했던 것이다.

 

5) 떡을 꾸는 자와 꾸어준 자

돌, 뱀, 배설물(전갈), 이것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결코 주시지 않겠다는 사물의 목록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 목록은 우리의 주된 기도의 제목들이었을 수 있다.

세상에 누가 돌덩어리를 구하고 찾고자 두드리겠는가? 우리의 기도 목록에 들어 있던 돌덩어리는 아마도 황금 덩어리였을 것이다. 하늘의 아버지께서 그것은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또 우리 중에 과연 뱀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그동안 아마도 황금을 손에 쥘수 있는 뱀의 지식을 구하였을 것이다. 황금을 만드는 기술(연금술)을 개발하다가 궁극적으로 얻게 된 금속이 철이었고, 뱀이 꼬리를 무는 형상인 그 시간의 퇴행은(금->동->철) 황금은 만들 수 없었지만 황금만능주의 시대를 열었을 것이다. 그 강한 철로 황금을 빼앗는 것이다. 그것 역시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리고 알(ᾠόν)은 씨앗이다. 삶은 계란이나 계란 프라이가 아니라, 씨앗이다. 씨앗은 다음 세대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물의 몸에서 나오는) 알/씨앗보다는 거기서 쏟아지는 배설물(κόπριον/ σκορπίον)이나 구하고 있었기에 하늘의 아버지는 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기도의 내용 곧 엄선된 기도의 제목들이 중요한데, 최종적으로 누가의 주기도문 컨텍스트는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그 방도로서 기도에 다시금 집중케 한다.

앞서 떡을 구하던 방도는 친구에게 강권을 하여 취하는 방법이라고 오인할 법하나, 우리는 이 내러티브가 다름 아닌 주기도문과 묶여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 내러티브(친구를 조르는)에서는 결론적으로 과연 ‘나’가 누구인지가 그 적용의 최종적 관건이다. 우리는 흔히 달라는 태도에 익숙한 나머지 친구의 집에 들어가서 강권을 하는 바로 그 사람을 ‘나’로 상정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세게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식이다.

하지만, 누가와 마태에게서 공히 포착되는 이 주기도문의 특징은 ‘죄’를 ‘빚’과 동의어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보다 마태복음이 더 심화되어 있다. 위의 마태복음 6장 12절 대목을 직역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ὀφειλέταις)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빚(ὀφειλήματα)을 사하여 주시옵고

ㅡ가 된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이 아니다. ‘우리에게 빚진 자를…’이다. 죄는 곧 ‘빚’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사함 받아야 되겠는데, 그것은 일종의 내가 가진 채권으로서의 빚(죄)을 남에게서 탕감해줄 때에 하나님께도 용서를(빚을 탕감) 받을 수 있는 원리다.

바로 이와 같은 구조와 원리가 마태에게서는 워딩으로 구현되었는데 여기 누가복음에서는 친구 내러티브로 살아나 있는 것이다.

즉, 우리는 잠들려는 친구에게 찾아가 떡을 달라고 떼를 쓰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떼를 쓰는 친구에게 떡을 빌려주었던 바로 그였던 것이다.

그 때에 떼를 쓰며 떡을 빌려갔던 친구의 빚/죄를 사하여 줄 때에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떡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누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창조적인 재구성이지만 누가 특유의 이른바 경제신학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으로서 신학일 뿐 아니라 실제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세계에 일용할 양식을 순환시키는 중차대한 법칙이기도 하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라고나 할까.

 

* 2016년 7월 24일 성령강림후 10주 | 좋은 것을 자식에게 | 누가복음 11:1-13. (cf. 호 1:2-10; 시 85; 골 2:6-15; 눅 11:1-13)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도상해석학과 신학의 지평융합: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후 해체시대의Post Secular 새교회 새목회 (2013). | Fb/@pentalogia Twtr/@pentalogia | You can add my to your circles. 로 연결해 보세요.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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