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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구약 성서 전체를 관통하는 신앙 주제들이 여럿 있지만 남은 자(remnant)라는 개념도 그 중 하나다. Kjv 기준으로 약 92회가 사용된다. 다음은 그 주제가 도출되는 주요 모티프들이다.

(1)

우선 노아는 홍수에서 남은 자였고(창 6:5-8; 7:1, 23), 롯은 소돔 멸망에서 남은 자였으며(창 18:17-33, 19:1-29), 모세는 남아(男兒) 살해 정책에서 남은 자였다(출 2:1). 그리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는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출애굽 1세대 중 남은 자였다(민 14:29-30). 세월이 흘러 이교도 우상의 제단이 횡횡한 엘리야 때에는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자 7천이 남겨진 바 있다(왕상 19:18).

(2)

그러나 무엇보다 궁극적인 적용은 후일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70년 후 돌아온 귀환자 공동체를 ‘남은 자’로 규정하는 신학일 것이다(슥 8:6, 11, 12). 특히 예레미야는 자신의 예언 속에서 이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50:20, 42:2). 예레미야는 이것을 메시야 시대의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기도 한다(23:3; 31:7).

(3)

그렇지만 그들이 포로로 끌려 갈 당시 “빈천한 자 외에는 그 땅에 남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4:14)는 표현이나 “빈천한 국민을 그 땅에 남겨 두어 포도원을 다스리는 자와 농부가 되게 하였더라”(왕하 25:12; 렘 52:16) 라는 식의 표현은 포로로 끌려갔다가 돌아온 남은 자들과 본토에 남겨진 자들 간의 이데올로기를 형성하기도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주요 맥락은 엄밀한 의미에서 이 이데올로기의 파괴에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며,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주도했던 인물 중 한 사람인 바울도 그런 화해의 견지에서 적극 수용하고 있다(롬 9-11장).

(4)

현대적 의미의 남은 자(remnant) 사상은 대개 어떤 이단들의 멤버쉽이나 종교이익집단들의 이데올로기로 가히 인플레이션을 이루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리 실생활 관계 속에 적용됨이 보다 종말론적 원형에 가까운 현대적 의미이다.

이의 적용을 위해 2006년경 학위 논문에 기록했던 <감사의 글>을 떠올려 공개해야만 했다. 거기에는 내가 감사해야 했던 인물군(群)이 세 개 그룹으로 요약되어 등장한다. (1) 은사군 (2) 재정 후원자군 (3) 현장 후원자군-.

하나님 알아가는 학문에 쓰기에는 경박하기만 한 기교나 일그러짐 따위들을 일일이 찾아 제해주시고 진리를 곧바르게 기술하는 방법을 그 정신과 실천의 삶을 통해 깨우쳐주신 OOO 박사님께 깊은 감사드리고, 많이 늦었지만 그분의 제자 대열에 합류할 수 있게 됨을 큰 은혜와 영광으로 생각하며, 저를 전도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끝없는 인내로 여러 차례를 세상 입 속에서 꺼내주신 OOO 박사님과 OOO 사모님께도 형언할 수 없는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 일하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을 갖지 못했음을 알면서도 사역자로 불러주신 OOO 목사님과 OOO 사모님에 대한 감사 또한 표현할 길 없으며, OOOO교회 성도들과 동역자들에게도 큰 빚이 있습니다. 그리고 학문 이전에 하나님 사랑과 은혜를 일깨워주시려 애써주시는 OOO 박사님 외에도 그리스도인의 참 명철과 지성이란 무엇인지 보여주시는 OOO, OOO 두 분 박사님께도 감사를 드리며, OOO 박사님은 이 졸고를 꼼꼼하게 읽어주시고 결론부의 결정적인 문제점을 알려주셨습니다.끝으로, 텅 빈 상태로 온 저에게 네 학기 동안 아낌없이 부어주신 OOO 박사님께 갚지 못할 은혜를 입었습니다.

나는 그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생각지도 않았던 남은 자로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그렇지만 어떤 이들의 경우는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은 존재로 심지어는 피차에 별로 떠 올리고 싶지 않은 존재로 남.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더 이상 그들의 남은 자(the remnant)가 아니며 그들도 나의 남은 자가 아님은 물론 피차 잃어버린 자(the lost)인 셈이다.

남은 자 사상은 국가의 존망이나 우주적 종말에만이 아니라 이같이 불과 수년전 <감사의 글>에 적용됨이 더 마땅하다. 아니, 그 <감사의 글>은 이미 우주적 종말의 현장인 것이다. 십자가 현장이 그러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 <감사의 글>을 덮어두고서는 엉뚱한 현장에 나가 종말을 맞으려 애쓴다. 텍스트(logos) 보다 실천(praxis)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먼지가 쌓이는 원리는 이처럼 <감사의 글>에 먼지가 쌓이는 원리와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성경>이란 알파, 베타, 감마-가 아니라 이와 같은 먼지 덮인 해묵은 <감사의 글>이다.

이 세상 모든 관계 속에서 ‘남은 자’가 되라는 말로써 ‘되도 않는’ 화해를 두고 속을 끓이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적어도 ‘너는 안돼!’ ‘그 종자들은 안돼!’ ‘아니야!’라는 식으로 <감사의 글>을 덮어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항상 그것을 열어두어야 한다. 렘넌트는 그루터기로만 사용해야지 원수가 만나는 외나무다리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 바알 신전에 가서 무릎 꿇을 그리스도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감사의 글>을, <성경>을 덮어두는 이들은 많다. 그 텍스트를 덮어둠으로 무릎 꿇는 것이며, 텍스트를 열어둠으로 ‘남은 자’가 될 것이다.

에필로그 | 남은 자 인플레이션

아모스 선지자는 그 남은 자 인플레이션을 이렇게 조롱하였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암 3:12)

우리는 무서운 사자 입 앞에 부들부들 떠는 양이 아니라 다 먹히고 남겨진 뼈와 살점들, 곧 비단 방석에 앉아 있는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 2014.1.5일자 | 남겨진 자(the remnant), 사라진 자(the lost). | 렘 31:7-14, (cf. 시 147:12-20; 엡 1:3-14; 요 1:(1-9), 10-18.)

* 이미지 참조:
http://www.yadvashem.org/yv/en/exhibitions/bearing_witness/surviving_remnant_shafrir.asp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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