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마.누.엘.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

임.마.누.엘.에서 가장 중요한 글자

<크리스마스>에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임마누엘>이지만 임마누엘이 지닌 맥락을 정확히 알고 쓰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그것이 권위 있는 한 예언자 <입>을 통해 계시된 줄은 알지만, 악한 어떤 왕의 <귀>를 통해 계시된 사실도 다 배제된다.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어릴 적부터 슬픈 날과 맞붙은 기쁜 날이었다. 크리스마스 3일 전인 22일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2월의 설레임을 다 만끽할 수 없었다. 22일 동안은 우울함과 동행하다가 3일간만 설렐 수 있었다.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는 누구에게나 부모의 추도일이란 게 그렇듯이 불효에 대한 회상과 동행하다가는 크리스마스의 설렘은 잠시만 누리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이런 양가적인 감정은 <임마누엘>을 이해하는데 남다른 도움을 주었다.

(1)

<임마누엘>을 최초로 계시 받은 그 악한 왕이란 남 유다의 아하스 왕을 말한다. 열왕기 역사가와 역대기 역사가 모두가 악으로 지목하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악이란 게 우상숭배를 말하지만 독특하게도 그는 이방 나라의 제사 단상의 디자인을 들여와서는 똑같이 따라 만든 인물이다. 그렇게 제단의 식양을 들여옴으로 기존의 제사 도구나 식양들은 다 구석에 처박아 둔 죄를 지적당하고 있다(왕하 16; 대하 28).

열왕기서와 역대기서는 일종의 역사 기록물이다. 그래서 그들이 행한 팩트만 기록하고 있다. 즉 지극히 역사가적인 필치로만 기록하다보니 사법적이면서도 – 심판 받듯 – 여타 이야기 플롯이 그냥 묻힌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그런데 본문 이사야서에 바로 그 묻힌 플롯이 묻어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가 야웨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그대로 그에게 전달하기를, “너는 징조를 ‘깊은 데에서든’ ‘높은 데에서든’ 구하라”(사 7:11)고 하였는데 그의 대답이 독특하다.

“나는 구하지 않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않겠나이다.”(12절)

얼핏 들으면 믿음의 격식을 갖춘 말 같지만 직역하면 한 마디로 말해서 “대써요!” 이다. 과격하게 하나님을 배격하지는 않지만 완강하게 그것을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점에서 그것은 플롯, 즉 우리의 삶과도 같은 것이다.

(2)

(열왕기/역대기와 같은) 역사가의 사법적 – 심판주的 – 진술과는 달리 이사야 선지자에게서는 이 악한 왕에게 다시 한번의 기회가 계시되고 있다. 포기하지 말고 징조를 구하라는 것이다.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자포자기 신앙에도 불구하고 이사야는 여기서 일방적으로 <임마누엘>을 강권하고 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다윗 가문의 일원에게 주어지는 기회인 것이다.

(3)

몇몇 빼고는 워낙 악명 높은 왕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아하스 같은 왕은 기억에서 사라지면서 그 <임마누엘>이라는 기호도 그냥 묻힐 뻔하였다. 그것을 살려낸 것이 바로 신약 공동체, 그 중에서도 마태라는 인물이다.

특히 그는 이 임마누엘이라는 기호를 천사의 <입>을 통해, 마리아의 남편 요셉의 <귀>를 통해 복원해냈다(마 1:18-25). 이사야 선지자의 입을 통해, 아하스의 귀를 통해 계시된 기호였음을 상기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요셉의 처지는 바로 그 아하스의 처지를 대변한다. 그 남성은 위대한 다윗의 후손이 아니라 ‘마리아의 남편’일 뿐이다(막 1:16). 아무도 다윗 왕가를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그는 잠들어 있을 뿐이다(마 1:20, 24).

(4)

우리의 우상숭배는 어디 으슥한 점치는 곳에 들어가 점치고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노쇠함이다. 희망 없음이다.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음이 바로 우상숭배다. 아하스와 요셉의 영적 상태에 부쳐 더 구체적으로는 어떤 한 가문의 일원으로서 그 가문에 대한 상실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상실감이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어머니)의 아들(딸)인가? 아니면 단지 어떤 목사인가? (아니면 어떤 직장인?) 아버지와 어머니가 지녔던 희망을 상실할 때 우상숭배인 것이다.

(5)

아하스가 “나는 도무지 구하지 않겠나이다-” 하는 것처럼,
마리아의 남편 요셉이 ‘잠들어’ 있을 때,

이사야가 <임마누엘>을 계시한 것처럼,
천사가 <임마누엘>을 계시한다.

그러면서 “마리아를 데려와라!”고 주지 시킨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마리아를 주저하지 말고 ‘데려와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저렇게 싫은 표정으로 마치 잠든척 하고 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도상(圖像)이다.

(* 그러므로 요셉의 저런 표정이 대부분의 <요셉의 현몽>도상을 주도하는 이유이다.)

에필로그 | 임마누엘의 기원

임마누엘( עמנואל / Immanuel).
임(with) + 마누(us) + 엘(El)
이 복합 단어 중에 El 보다도 중요한 게 바로,
“임”(Im/with/עמ)이다.

왜냐하면 야웨라는 하나님의 궁극적 성명의 기원 동사가 되는 “하야”(to be)에 얽힌 그 모든 시제 즉, 과거(was), 현재(is/is-ing), 미래(will be)를 담고 있는 전치사가 바로 “임”, “함께”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라는 이름도 이 기원 아래서 도출되어 나온 이름에 불과한 것이다.

* 2013.12.22. 대강절4주차 | 임마누엘에서 가장 중요한 것 | 사 7:10-17; 마 1:18-25, (cf. 시 80:1-7, 17-19; 롬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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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도상해석학과 신학의 지평융합: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후 해체시대의Post Secular 새교회 새목회 (2013). | Fb/@pentalogia Twtr/@pentalogia | You can add my to your circles. 로 연결해 보세요.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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