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 같은 영화 <기생충>

‘기생충’ 같은 영화 <기생충>

지난 해 5월 25일에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이 지난 1월 6일자에 골든 글로브상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또 수상했기에 이 영화에 관해 몇 자 요약해 남긴다.

영화 기생충. 감독 봉준호. 132분

우선 이 영화는 자본에 대한 극한 혐오를 내용으로 안고 있지만 그 누구보다 자본을 과시하는 영화다. 처음 개봉 당시 칸 영화제 수상일자가 5월 25일인데, 국내 개봉은 5월 30일이다. 상 받은 영화니까 입다물고 알아서들 봐라 이거냐? 봉준호보다 시나리오를 잘 다루는 작시가들은 국내 얼마든지 많지만 요즘 한국 영화는 이와 같이 해외 시상을 제작 단계에서부터 기획한다.

그러고는 그 비용을 국내 관객에게 청구하는 구조이다. 그래서 해외에서는 한국 <기생충>이라고 귀여움을 받았을지 모르지만 이런 비평도 한 번 들어보시길.

이 영화의 지배 윤리는 ‘선을 넘지 말라’는 금제에 대한 극도의 혐오이다. 즉 ‘선을 넘어라’인 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지금부터 <기생충>에 나타난 봉준호의 세계관을 원하는 대로 ‘선을 넘어서’ 열어 보여드리겠다.

봉준호의 포르노그라피

통상 범주론에 있어 동양적 세계관을 시간-역사적 범주(temporal-historical categories)라 하고 서구의 세계관은 공간-수직적 범주(spatial-vertical categories)라고들 하는데, 봉준호의 포르노그라피는 이 두 개가 엉겨 붙어 있다.

왜 그럴까. 흔히 서양의 에로티시즘은 형체(shape)와 면적이 충분해서 그런지 운동력으로 자극을 하는 반면, 공간적으로나 면적으로나 그렇지 못한 동양의 에로티시즘은 평면적일 뿐 아니라, 그래서 관계성에 호소하여 독자/관객을 자극한다.

대표적인 예시가 일본이다. 공간적이거나 운동력에 호소하기보다는 관계나 심리의 설정을 통한 청자의 연상을 자극한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에서 보여준 봉준호의 포르노그라피는 미제와 일제 중에, ‘일제’라 할 수 있다. 옷을 한 장도 벗지 않는데도 관객들이 가족과 못 볼 영화라며 투덜대기 때문이다.

부부라는 허가 받은 틀 속에서 마음껏 포르노그라피

이런 동급의 영화를 무명의 포르노 감독이 만들었다면 15세 관람가를 얻었을까? 그것은 동종 산업 종사자에게 물을 일이다. 아마 이 영화가 미제를 타도하는 영화라는 점이 관료나 권력 실세들을 매료시켰을 법도 하다.

하지만 이 영화의 포르노그라피는 꽤 공간적이라는 점에서는 미제이기도 하다. 관객은 저속하다면서도 “시계방향으로 돌려”라는 여배우의 음성을 잊지를 못하는데, 아무도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알려주는 이가 없다. 그래서 알려드리겠다.

봉준호의 계급주의

나는 이 영화를 보다 소독 가스 씬을 또 보고는 ‘봉준호는 소독 가스 패티쉬인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괴물>에서도 소독차 소독 가스를 전신에 씌우더니 이 영화에서도 소독차 가스가 온 사방을 덮어씌운다.

봉준호 감독의 2006년작 괴물

소독차 소독은 과거의 추억이 아니라, 아마 현실 속의 가난한 사람들의 상징으로 들여온 것 같다. 부자들은 높은 곳에 살기에 태양과 가깝고, 가난한 자들은 낮은 곳에 살기에 습윤과 거기에 기생하는 벌레들에 더 노출되기에 소독차의 가스는 마치 벌레와 동급이 된 듯하게 보이려는 매개일 것이다.

그렇다면 반지하에서 실제로 살고 있는 관객에게는 이 대목이 어떨까. 영화가 이해를 해주니 참 감사할까? 아니면 뭔가 희망을 주는 영화이기에 감사할까?

어떠한 공감도 희망도 제시 못하는 영화라는 점에서 봉준호의 세계관은 계급론에 있어서도 ‘포르노’다. 매우 잔인하다. 그런데 이 반지하가 가장 하층인 줄 알았더니, 한 단계가 더 있다.

이 영화에서 반 지하 방은 계급의 상징

생각 없는 평론가들은 설국열차의 수평 구조 계급이 수직적으로 되살아났다고 입에 침이 마르지만, 거듭 말하거니와 감독의 세계관에 고착화된 포르노급 계급주의일 뿐이다. “시계방향으로 돌려”야만 열리는 위대한 예술적인 저택의 지하는, 여성의 신체를 은유하기 때문이다.

봉준호의 물질관

비굴하고 구차하고 아무 계획도 없이 사는 가난한 가장이 이르기를 “부자들은 착해 보인다”고 하자, 바로 이 때, 몰상식하고 상스러운 가난한 아내가 이르기를,

“아니야! 부.자.니.까. 착.한.거.야!”
“부자들은 구김살이 없어. 착하니까.”

이 아내의 말은 진리이다.
“부자니까, 착하다.”

실제로 가난한 사람은 착하고 싶어도 착할 수가 없다. 거리에서 인사를 하는 사람은 대부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가난한 사람은 인사를 할 겨를이 없다. 겨를이 없으므로 마음에서도 멀어져 착함이 떠나간다.

가난함에 대한 현대적 디테일로 자극

이것을 극복하고 착함을 다시금 있는 힘껏 끌어올리려면, 그 근원은 오로지 정신소(所)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 가난한 자들이 내뱉는 지복(至福)의 세계는 고작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인 것이다.

그러나 봉준호에게는 물질이 모든 착함의 근원이다. 왜냐하면 물질이 있어야 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실제로 우리가 체험하는 진리이지만, 유물론적 진리이다.

그래서 반지하방에서(또는 그 이하에서) 사는 사람들을 소재로 한 영화를 만들어 착해질 수 있는 돈을 벌었지만, 저 모든 반지하방의 사람들을 꺼내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유물론 자체가 상부구조를 무너뜨려 하부구조를 착취하는 기생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생충>의 물질관이다.

봉준호의 트라우마

<기생충>의 산수경석(山水景石)은 이 영화에 있어 아무런 역할도 못하는 ‘심볼’이다. 이 산수경석의 주인이 육사(육군사관학교) 시절부터 애지중지 하던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관객들이 다소 좀 뿜을 수밖에 없었다.

이게 사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시절이면 대담한 기호 역할을 해줬겠지만, 지금 저런 대사를 듣자니 “봉준호도 한물 가나…” 하는 생각이 불현 듯 스칠 수밖에 없다.

산수경석이라는 심벌라이징은 상투적 작시의 한계

이 기호로 뭔가 스토리의 뒷정리를 해주려 한 것 같은데, 이 영화가 벌여만 놓고 뒷정리가 안 된 것은, 저 산수경석이 이야기의 주된 기호라기보다는 감독의 트라우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자고로 포이에티케(Poietike)에서는 말하기를 ‘스토리에서 있으나 마나 한 것은 없어도 되는 것’이라 하였다. 젊은 친구들에게 육사에서 비롯된 산수경석을 애지중지하다간 뒤통수 깨진다는 교시를 하는 신파인가? 애들 웃을 것 같다.

봉준호의 기업관

봉준호의 기업관은 편중되어 있다. 유물론이면 사실 철저히 자본과 거리를 두어야 하는데,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부자이기 때문에 착한 사장, 박 사장님은 글로벌 IT기업의 자수성가한 젊은 사장으로 나온다.

배역들은 이 부자 가정에 큰 감정이 없다. 오히려 감사해 한다. 그런데 결국에는 큰일을 저지르고 만다. 그것은 사람을 미워하는 게 아니라, 계급을 가져오는 사회구조를 미워하라는 암시인 것 같다.

배역들에게는 부자 증오가 없지만 영화만이 부자 증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이다. 다른 말로 하면 봉준호의 유물론과 계급주의를 토대로 한 기업에 대한 가치관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부자가 어떤 아이템을 다루는지까지 영화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제품 또는 통신기기…, 어떤 기업을 특정지으려 한 것일까. 영화 <곡성>의 나홍진은 특별히 삼성 카메라를 특정한 바 있지만, 봉준호는 그런 담력도 없는 것 같다.

부자에게 감사를 해야 한다는 심정과 냄새를 참지 못하는 부자에 대한 적개심의 양가적 분열 속에서, 그 기업이 누구를 특정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우리는 적어도 봉준호의 악덕 기업 목록에 외식업, 엔터테인먼트, 드라마 제작, 영화관 운영업은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봉준호가 제조업을 특별히 싫어하지 않는 한, CJ의 업종을 떠올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이라는 플롯은 실사 같기만 하다.

이렇다 할 제조업이 없는 CJ 컴플렉스…를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인 셈이다.

CJ 계열사
유통 3사 영화배급 현황 (2017상반기 기준)

봉준호의 패착(敗着), 반미(反美)

봉준호는 이 영화에서, 산수경석(山水景石)을 애지중지하던 젊은 세대는 뒤통수가 깨지고, 영어를 섞어 쓰는 부자는 미국식 파티를 열고 미국 원주민 인디언 놀이를 하다 결국 인디언에게 유혈 봉변을 당해 잔혹 파티로 끝을 맺는다는 교훈을 스펙터클하게 마무리하려 한 것 같다.

이런 아류식 클리셰의 꾸밈새, 특히 이런 마무리를 무슨 학익진(鶴翼陣)인가 뭔가라 명명하는 대목에서는… ‘아, 이제 정말 봉준호도 50대에 들어서는구나’ 하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반일(反日)을 외치는 일제 포르노그라피 키즈, 계급에 기생하는 반(反) 계급주의자, 육사 콤플렉스, 제조업만 골라 패는 매국적 기업관, 이런 ‘기생충’들이 근절되어야 함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기생충>이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유럽이나 미국 시장의 PC 정서상 특이해보였을 한국식 反美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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