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좌파는 어떻게 한국교회를 집어삼킬 수 있었나?

기독교 좌파는 어떻게 한국교회를 집어삼킬 수 있었나?

사도 바울 (부분). 렘브란트 1657년작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좌파’라는 분파 개념이 기독교 내에 실존하는지, 실존하더라도 그들에게 좌파라는 호칭은 적절한지,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특정 집단에 집어삼킬 수 있는 것인지 회의적인 시각이 일 수 있다.

그렇지만 집어삼킨 적도 없고 또 집어삼킨 자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다. 한국교회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읽는 여러분이 이 글에 화가 난다든지 모종의 감정이 일어난다면 그 두 가지 즉 ‘기독교 좌파’ 그리고 ‘한국교회를 집어삼킨 일’, 이 둘은 실존하는 것이다.

우선 이 글에서는 제목과 같이 기독교 좌파가 어떻게 한국교회를 집어삼킬 수 있었는지에 관하여 정리하고, 그 ‘기독교 좌파’가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따위는 다음 회에 논하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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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좌파는 어떻게 한국교회를 집어삼킬 수 있었나”

세습교회 때문에? 목사들의 섹스 스캔들? 돈 스캔들? 이것들이 문제는 문제였지만 문제의 본질은 아니다.

문제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위해 잠시 AD 1세기 유대교의 전환기 과정을 들려드릴까 한다. 한국교회가 기독교 좌파에게 잠식당하는 과정과 대단히 유사한 면이 포착되기 때문이다.

이미 BC 1-2세기 경의 유대교는 과거의 상류계급과는 별개로 새로운 상류계급이 급부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율법학자들’이었다.

당시의 귀족은 모두 다 세습귀족을 말한다. 이들 세습귀족은 둘로 나뉘었다. ‘세속적인 세습귀족’과 우리가 이제 관심 가지고 지켜볼 ‘종교적 세습귀족’이다. 신흥 상류계급 곧, 율법학자들이 바로 이들과 종교 권력 다툼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이들 간에 벌어진 권력 쟁탈전은 시간이 흐를수록 신흥 상류계급에게로 승기가 넘어갔다. 대체 어떻게 했기에 그리 될 수 있었을까? 이들 신흥 상류계급은 대체 어떤 자들이었기에 그토록 오랜 역사를 장악하던 세습귀족과 감히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고, 어떻게 했기에 그들을 집어삼킬 수 있었을까? 이들의 막강한 힘은 대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과거의 율법 해석의 권위는 대부분 고급사제 계급에게 있었다. 세습사제 계층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권위는 단지 세습에서 오는 것만이 아니라, 율법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해석능력에 기인하는데 이러한 고급사제들이 AD 1세기 초까지만 해도 건재하였다고 한다.

이를테면, 탈무드에 나오는 성전 경비대장 랍비 하나니야라든지 그 외 랍비 문헌에 나오는 어떤 대제사장의 손자인 이스마엘 같은 사람은 당시 유력한 세습귀족 가문 출신의 율법 권위자다. 우리가 잘 아는 플라비우스 요세푸스도 바로 이런 귀족 출신의 문서 권위자이자 문필가였다.

그러나 율법학자들 가운데는 귀족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류계급 사제로부터 다양한 계층이 있었다. 가령 헬라식 전통의 회당에 봉직하는 세습 가문의 자식들이라든지, 성전의 수문장 아들, 성전에서 노래하는 가수의 아들 등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을 심층적으로 살폈을 땐 보다 다양한 직업군 계층이 율법학자라는 타이틀로 결합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성전이나 회당에서 직간접의 예전에 종사하는 사람들 외에도 포도주장수, 기름장수, 목수, 천막제조자, 못대장장이…등 다양한 직업군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들 후자의 경우는 세습귀족들에 비하면 사회적으로 천한 출신에 속했으며 상대적으로 가난했던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이들에게 종교 권력의 승기가 넘어왔던 이유는 오로지 하나, 오직 지식만이 이들 율법학자들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이와 같은 승기를 거머쥐게 되는 데는 사회적으로 이런 역학구조가 있었다.

당시 제국의 힘 아래서 살아가야 했던 일반 시민들은 형사와 민사에 관한 법률에 있어, 어지간한 민사재판의 경우는 회당과 같은 지역 공동체에 의존했다. 회당은 중대한 민사법정뿐 아니라 경미한 형사 건에 대한 치리까지도 관할했던 흔적이 여러 사료에서 발견된다.

바로 이때, 어떤 공동체가 그 민사재판의 진행을 위해 재판관을 임명할 경우 누구를 임명할 것인가 하는 점이 대두되기 마련이다(정식 재판정은 아니기 때문에). 즉, 이때 판결을 내리기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바로 법률에 대한 지식과 그에 관한 해석 능력이었는데, 그에 관한 뛰어난 실력이 바로 이들 신흥 율법학자들에게 있었던 것이다.

상대적으로 사제 가문의 세습귀족들에게서는 이 지식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현상이 벌어졌다. 이는 옛 세습귀족들이 차지했던 많은 주요 자리들이 AD 1세기에 이르러서는 거의 대부분 이들 신흥 율법학자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신흥 상류계급은 이렇게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1세기 팔레스타인의 스케치가 아니라, 단연코 우리나라 전통교회가 기독교 좌파에게 넘어간 개요이기도 하며, 또한 이것은 굳이 종교와 세속의 구분 없이 이번 새 정부가 들어서는 과정에서 목격되었던 일련의 율법사들 즉, 법조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미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바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종교에 관한 한, 저와 같은 AD 1세기의 정치적 헤게모니 변화가 율법학자들이 그렇게 막강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궁극적 이유인 것은 아니다. 그럼 대체 뭐냐?

당시 율법학자들이 그와 같은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던 궁극적 이유는, 그들이 종교법 자체에 관해 능통해서 그런 요직을 점거할 수 있었던 게 아니라, 바로 이들이 ‘비의적(秘義的)’ 전통에 능통하여, 그 비의적 지식들을 탐색할 줄 아는 자들이었다는 사실에 있다. 비의적 지식이란 무엇인가?

어떤 면에서 이 같은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의 변화와 이 시대 한국교회의 변화는 지당한 역사적 흐름으로 비칠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단연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칫 새로운 율법학자로 비칠지 모를 기독교 좌파는 결코 ‘바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도리어 회심 이전의 바울이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성도를 색출해 잡아가는, 살기가 등등한 바울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그들은 언제나 교회파괴적 행태를 구사한다. 정의의 칼을 든 구식의 바울처럼.

나는 이와 같은 우려를 같이 하는 한국교회를 사랑하는 많은 젊은이에게 권고한다. 이들로부터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다시 탈환해올 것을. 그 일을 어떻게 해낼 수 있을까?

우선 율법에 능통한 자들이 될 것을 권고하는 바이다. 전통교회의 잠식은 개인의 섹스 스캔들이나 돈 스캔들 때문에 온 게 아니라, 지식의 질적 저하에서 가속화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시 권고하건대 율법에 능통한 자들이 될 것을 권고한다.

그리고 특별히 비의적(秘義的) 전승에 능한 자 되기를 당부 드린다. 그것이 이 시대의 신흥 종교귀족 기독교 좌파들에게서 교회를 재탈환해낼 강력한 무기가 되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비의적 지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행 17:22-34

바로 이 알지 못하는 신(ΑΓΝΩΣΤΩ ΘΕΩ)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능력. 오로지 이 능력만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이 적그리스도 시대에 빠진 절체절명의 우리 전통교회를 꺼내올 진정한 율법학자 바울로 만들어 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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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비의적(秘義的) 지식’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고대의 역사적 랍비들에게 ‘비의적 전승’이라고 하면 카발라(קַבָּלָה) 아류를 일컫는 말이지만, 실질적 랍비들의 파워는 이 신비주의 자체에서 나온 게 아니라 이 카발라 따위를 지지대로 삼아 토라를 해석해 내는 능력에 있었다.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고 권위를 획득한 것이다.

오늘날 전통교회는 이러한 지적 수단과 능력이 부족한 까닭에 신천지 같은 이단과 기독교 좌파에게 영혼을 빼앗기는 원인이 되었다.

간증집이나 영성일기 같은 것에만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비의적인 세계 속에서 그 알지 못하는 신(ΑΓΝΩΣΤΩ ΘΕΩ)을 발견해낼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좌(左)로도 우(右)로 치우치지 않는 그 신실한 태도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신천지로 비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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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이글의 커버 그림을 그린 렘브란트는 살아생전 ‘바울’을 두 차례 그렸다. 하나는 늙은 바울을, 다른 하나는 젊은 바울을. 각각 1627년과 1657년에 그렸다. 젊은 바울이 후기의 작품이다. 렘브란트는 어찌하여 후기에 젊은 바울을 그렸을까?

사도 바울 (전체). 렘브란트 1657년작
사도 바울. 렘브란트 1627년작

전작인 노쇠한 바울은 머리칼도 헝클어져 있고 한쪽 신발도 벗겨져 있어 동공 풀린 시선이 말해주듯 감옥에 갇힌 말년의 신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후기작 속의 젊은 바울보다 오히려 바울답고 후기작보다도 힘에 넘친다. 창문에서 들어온 빛이 그의 뇌리를 빛나게 하기 때문일까. 이에 비해 후기작 속의 젊은 바울은 바울이라기보다는 단지 이야기가 고갈되어 머리를 쥐어짜는 문필가와도 같은 모습일 뿐이다. 차라리 톨스토이에 더 가깝다고나 할까. 게다가 책상과 벽 사이에 꽂힌 장검은 감옥 속에 갇힌 바울의 장검이 바로 들어 휘두를 수 있는 위치에 놓여 있던 것과 달리 장검인지도 한참 만에 발견할 수 있다. 장검을 상징화 속에 가둬버린 이 젊은 바울은 렘브란트의 달라진 환경을 반영한다. 후기의 삶이 전기보다 어려웠던 것으로 알려진 렘브란트가 경제적으로 쪼들린 이유는 물질을 탕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자신이 그린 그림을 직접 경매에 부칠 수 있었던 과거와는 달리 이 젊은 바울을 그릴 때쯤은 그림 매매상 길드(guild)들이 마음 대로 가격을 정하였다. 그러다보니 작품은 더 생산적이어야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에 그려진 이 젊은 바울은 렘브란트의 순수 작품이라기보다는 도제들의 생산적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바울을 톨스토이처럼 만들어 놓은 것은 그 시대의 수요가 요구한 탓일 것이다. 그런 수요와 생산성이 감옥 속 노쇠한 바울의 왼손에 꽂힌 펜대를 젊은 바울의 오른손으로 옮겨 놓았다.

반면, 전기에 그린 저 노쇠한 바울을 그린 시점은 렘브란트로서는 처음으로 제자를 받을 수 있는 전성기의 출발 시기였는데 가히 21세기의 구도와 표정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매우 지쳐보지만 빛이 서려 있는 렘브란트 실제의 젊음을 반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의 왼손의 펜대는 그가 왼손잡이라서가 아니라, 생각에 잠긴 그의 우측 손이 언제라도 우측으로 뻗어 칼을 잡을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후기의 도제들에게는 이런 이해가 없었던 것 같다.

이제 명계의 입구에 한층 다가선 우리 시대에 우리가 그려낼 수 있는 바울은 어떤 표정일까. 렘브란트의 진품 속 바울도 젊었지만 바울은 실제로 죽는 순간까지 그 영이 젊음을 유지하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시대를 저 장검으로 꿰뚫고 있기 때문이다.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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