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중권의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신학적 서평

진중권의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신학적 서평

진중권,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천년의상상, 2020)

이 글은 진중권 교수의 책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역사편에 관한 간략한 서평이다.

1. 안티 기독교 세 사람

나는 오래 전에 <안티 기독교 세 사람, 니체, 김용옥 그리고 진중권>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일이 있다. 제목만 들으면 세 사람을 비판한 내용 같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세 사람이 기독교에 대해 어떻게 오해하게 되었는 지 공통점을 소개한 내용이었다.

제목만 보고 달려온 팔로어들에게 한 동안 시달려야 했지만, 나의 추론은 그렇게 빗나간 것이 아니다. 세 사람의 담론에서는 적어도 힌두교나 이슬람교 토양에서는 맡올 수 없는 흙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티 크라이스트 (The Antichrist)를 제창한 프리드리히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 하였을 때 Gott gestorben(God died)이라 쓰지 않고 Gott ist tot(God is dead)라고 쓴 것은 하나님이 사망(died)했다는 뜻이 아니고, 사람들이 만든 하나님이 낡아져가고 있다(is dead)는 뜻이라는 사실도 나는 이해했기 때문에 이들의 방법적 안티가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이들 셋 중에서 진중권은 제외하기로 했다.

2. 고양이 사물화(Verdinglichung)를 통한 해석학

이는 딱히 그가 지금 월교(月敎) 신자들과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는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바로 이 책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를 읽고 얻은 어느 정도의 확신에 기반한다.

이 책은 ‘고양이’라는 생물을 매개로 해석학을 구현하는 책이다.

그의 고양이는 여기서 사물화(making into a thing)된 생물이다. 저자는 고양이를 인류보다도 더욱 ‘생물’이라 웅변하지만 사실은 그 웅변속에서 고양이는 더 사물화된다. 왜냐하면 사물화 속에서 생기(生起)하는 것만이 언제나 해석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해석의 대상만이 진정한 생물이다.

고양이 사물화의 구체적인 성징은 1)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오랜 전부터 고양이는 반려 동물로서 역사를 지닌 존재라는 사실, 2) 그런데 그 고양이가 (개와는 달리) 도무지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는 존재로 전래해왔다는 사실로서 맺힌다. 그런 점에서 묘주(猫主)는 어느새 그 ‘묘’의 집사(執事)라는 역 관계로 접어든다는 점. 고양이 기르는 사람들은 이 순환 관계를 다 아는 모양이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을 위해 ‘고양이를 기른다’는 명제 이면에는 사실은 언제나 고양이가 ‘인간을 부리고 있었다’는 해석학적 실제(existence), 이것이 이 책의 출발점이다.

이 어려운 전제를 진중권은 쉽게 써내려간다.

독자는 해석학을 알 필요가 없다. 그가 마련한 장치에 들어가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아마도 그의 책을 수십 권 읽어도 독자는 해석학을 알지 못한다. 이 장치 속에서 저자는 해석학 선생이 아니라 스토리텔러이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꾼은 수많은 개념과 개념어 그리고 그 개념(어)의 창시자들을 이야기 속에 마구 주워 담아 넣고 있지만 전혀 거부감 없이 읽게 되어 있다. 독자는 이미 이 저자의 집사로 전환되어 있는 까닭이다.

3. 창세기로 시작하는 책

이 책의 첫 챕터는 ‘고양이의 창세기’이다.

진중권은 어찌하여 고양이의 세계를 브라흐마(梵天)가 창조한 세계로 서술하지 아니 하고 ‘창세기’의 세계로 특정하였을까.

저자가 이 책 59쪽 언저리 “…온갖 죄악으로 더럽혀진 세상을 보다 못해 하나님은 인간들을 큰 물로…” 라고 말하는 대목에서 순간 울컥하게 된 것은 내 어느새 ‘묘주’가 되어버린 탓일까?

저자는 왜 ‘하나님’을 ‘하느님’이라 하지 않고 ‘하나님’이라고 하였을까? 니체의 국산 아류는 대부분 ‘하느님’이라 부르기 마련인데, 대체 왜 ‘하나님’이라고 적었을까.

‘하나님’은 개신교의 용어이다. 개신교인들은 ‘하나님’이 ‘하느님’(하늘)과 달리 ‘하나’라는 뜻인 줄 알고서 ‘하나님’을 고집하지만, 실은 어원으로나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하느님’과 같은 우리말에 기원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순전히 개신교인의 사용에 의해서 굳힌 용어인 셈이다. 이런 명칭은 출판사 또는 편집자의 용어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책은 진중권의 책이다.

이처럼 진중권은 자신의 책에서 많은 성서 담론을 늘어놓는다. 하지만 도올 김용옥의 것처럼 불쾌하지 않다. 김용옥은 불쾌하고 왜 진중권은 불쾌하지 아니한가.

성역(聖域)의 경계 의식에 대한 기본 준거의 차이일 것이다.

진중권은 기독교에 대한 많은 파괴적 언사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뜯어보면 기독교를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대개 기독교인(人)에 대한 것이었음의 경계가 있다.

반면 도올 김용옥이 신성모독으로 비치는 이유는 성서(聖書)를 대상으로 모욕을 가한 다음 거기서 쏟아져나오는 기독교인(人)들을 싹 쓸어담아가는 상술에 기인할 것이다.

이는 김용옥과 진중권 각자의 글에 등장하는 모친(母親)을 두고서도 현저한 서술의 차이로 나타나는데, 진중권의 글 속에서 어머니는 언제나 그 ‘믿음’이 묘사되고, 김용옥의 글 속에서는 어머니의 믿음을 뛰어 넘어 자신이 공략해 무너뜨린 기독교― 그것은 구체적으로 성경 ―에 대한 과시가 담겨 있다.

이것이 도올 김용옥(그리고 니체)의 해석학과 진중권 해석학의 차이이기도 하다. 전자가 지옥으로 인도할 확률이 훨씬 높다.

이 책은 ‘역사’ 편과 ‘문학’ 편이 한 세트이다.

4. 창세기로 마치는 책

그러나 진중권은 이 책에서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오해하고 있다.

‘부끄러움’에 대한 오해이다.

이 책 종장에서 데리다를 인용하면서 데리다의 일화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데리다는 샤워를 마치고 욕실을 나서다가 자신의 알몸을 바라보는 고양이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부끄러움’ 자체가 아니라고 진중권은 적고 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누구’ 앞에서의 부끄러움이었느냐”는 것이다.

진중권은 구약성서의 창세기로 이 종장을 마무리 하면서― 창세기로 시작하고 창세기로 마무리하고 있다 ―인간이 태초에 신 앞에서 벌거벗은 몸을 부끄러워하였듯이 고양이 앞에서도 부끄러움을 느꼈기에 그 부끄러움에는 ‘차이’가 없다는 놀라운 결말로 인도한다.

동물과 신의 경계를 단번에 무너뜨리는 종언이 아닐 수 없다.

진중권이 말한 ‘차이’는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에 있어 중요한 술어이다.

참고: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차이’(differ)와 ‘연기’(defer)가 합성된 프랑스어 디페랑스(différance, 주로 ‘차연’으로 번역되며, ‘연기’라는 뜻을 내포한 ‘차이’라는 의미의 학명)를 은유하면서 ‘차이’는 ‘다르다’기보다는 (모든 사물이) ‘연기’(반복) 선상에서 ‘존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 결말의 인용은 진중권이 차별을 혐오하고 동성애자의 대변자를 자처한 사유와 이념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는 총체적으로 (데리다의) ‘차이’에 대한 오해에 기인한다. 그 오해는 또한 앞서 ‘부끄러움’에 대한 오해에 기반할 것이다.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 데리다의 디페랑스 ‘차별없음’(차연)은 ‘연기’(緣起)가 아니라 오로지 ‘차이’(다름) 속에서만 생기(生起)하기 때문이다.

둘째, 최초의 인류가 최초의 부끄러움을 느낀 것은 ‘신’(하나님)이 쳐다보았을 때라는 이 책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다. 부끄러움은 하나님이 쳐다보기 이전에 이미 자기 아내 또는 자기 남편이 쳐다볼 때 느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부르기 전에 이미 그들은 서로 옷을 만들어 입지 않았던가?) 아내와 남편에게 서로 부끄러워지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신 앞에서나 고양이 앞에서나 ‘차이’ 없는 벌거벗음으로 진정한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벌거벗었음을 거나 모르는 ‘차이’로서만 진정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다. 눈이 밝아지지 않았더라면 아마 ‘차이’는 몰랐을 것이다. 이 모르는 벌거벗음의 ‘상태’를 우리가 ‘원죄’라 부른다.

‘앎’과 ‘모름’의 이 차이가 비로소 데리다의 ‘차연’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이를테면 기독교인이 차별금지를 반대하는 것은 동성애자를 특별히 미워하고 차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차별금지법이 ‘차이’ 자체를 제거함으로써 발생하는 모든 존재 기반의 붕괴를 저지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은 ‘천년의 상상’에서 출간되었으며 가격은 13,000원. 일독을 권한다.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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