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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식 진화론
 
 
진화론, 즉 생물로서의 한 종(種)은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그것이 지닌 본성을 완전히 바꿀 수 있을 뿐 아니라 완전하게 새로운 종으로 생겨날 수도 있다는 이 생물학적 이론은 각각의 종이 개별되게 창조되었다는 당시의 견해를 전복시킴으로써 서구 사회를 강타했다. 생물의 종에 관한 이같은 시각은 성서를 중심으로 하는 그리스도교 세계에 우선 큰 파장을 가져왔지만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에서 시작된 존재의 본질을 묻는 서구의 철학적 전제의 틀을 뒤흔들었다는 점에서 정치, 사회, 경제 전반에 걸친 행동 양식의 변화를 고하게 된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어떤 목적론이나 인과율을 파괴할 수 있는 확실한 위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주로 그리스도교 세계관으로 형성되어온 서구 사조가 진화론에 가격 당한 폐해는 종교적 문제 같지만 실상은 사회·문화적으로 더 큰 폐해를 가져온 것이다. 변이, 생식, 유전 따위의 생물학적 범주에 불과한 요소들에 도태, 적자생존, 용불용 등과 같은 형식적 추론이 장착됨으로써 그것은 어떤 특수 인종들의 행위가 갖는 정당성 내지는, 그들의 강령으로 제시되었기 때문이다. 진화론의 효시로 꼽히는 다윈의 <종의 기원>은 그렇게 생물 전반에 걸친 박물학 교본 정도에 그칠 수도 있었으나 그 논조를 휘감고 있는 궁극적 전개가 인류를 겨누다 보니 인종 문제에 적용될 때 그것은 서슴없이 강자의 정당성 교본으로 탈바꿈 되었던 것이다. 실제로 진화와 도태, 그리고 거기서 도출된 적자생존이라는 이론은 별다른 저항없이 일종의 사회 법칙으로 규정되어 노예인종과는 다른 주인인종이라는 파시스트 개념에 길을 터주었다. 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 진화론에 적대적인 그리스도교에 조차 이 개념이 침범해 있다는 사실이다.
 
 

 
 
도태와 생존.
 
 
진화론에 맹공을 퍼부었던 그리스도교가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말씀을 근거로 약육강식을 정당화 한 환경파괴에 신학을 접목하였는가 하면, 약소 민족을 향해서는 식민지 사관적 선교신학을 펼쳤고, 자본주의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성공주의에 편승한 번영신학 따위를 설파함으로써 물량적 부흥에만 몰입했으며, 또 그것들에 대해 합법성을 부여하기에 이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진화론이 갖는 논제는 그것이 ‘과학적으로’ 맞다 틀리다라는 시대착오적 논거 보다는 그 이론이 당대 사회, 문화, 종교에 걸쳐 어떻게 부당한 정당성으로 오용되었는가에 대한 반성에 있다 할 것이다. 원숭이가 사람이 되었다느니(변이), 기린의 목이 높이 있는 먹이감 때문에 늘어났다느니(용불용) 하는 구시대적 이론과 약육강식 따위의 정당성에(적자생존) 부역 당했던 전력만 제외한다면 진화 자체는 변화라는 측면에서 아주 낯선 법칙인 것만은 아니다. 그리스도교는 그야말로 도태 속에서 생존한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변화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었다.
 
 
예수님을 만난 순간 변하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부르실 때 하던 일을 그 자리에서 멈추고 따랐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변화입니다. 사람이 어떤 경우에 하던 일, 곧 직업을 바꿀 수 있겠는가? 사례를 더 쳐준다고 한 것도 아니고 단지 물고기가 아닌 사람을 낚는 과업으로의 요청이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천국을 전파하고 병든 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며(마 10:4-15) 세례를 베풀기도 하는 변화를 전개해나갔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또 변하다.

베드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또 한번 변한다. 예수께서 어디를 가든 따를 것이라고 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자신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면서 발견한 것이다.
 
 
두 번째 변화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또 다시 변했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부활을 목격하지 못했다. 십자가 달리시기 전에 예수께서 부활에 대한 여러 차례의 힌트를 주었는데도 부활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 그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찾으러 다닌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께서 찾아오신 것이다. 그 때 다시 한번의 변화를 받았다.
 
 


 
 
그리스도교식 적자생존.

다윈의 진화론에 입각해서 보면 그리스도 자신이나, 또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나 모두 생존에 적합한 존재는 아니었다.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고, 삶에 영민한 종(種)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적자생존의 생태계 속에서 언제나 죽음을 배우고, 매맞는 것을 배우고, 손해보는 것만 배우는 종이 과연 어떻게 살아 남을 수 있었겠는가? 그것은 생물학적인 변이, 생식, 유전의 진화 관점에서는 이해 불가이지만, 전적인 성령으로 말미암은 진화라고 했을 때 이해될 수 있다.
 
 
* 2013년 4월 14일 부활주일 후 제 3일 | 도태와 생존. | 성서일과, 요 21:1-19. (c.f. 행 9:1-6 (7-20); 시 30; 계 5:11-14.)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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