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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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복음과 행전.

사도행전은 누가행전이라고도 부른다. 누가가 썼기 때문이다. 누가의 저술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들이 복음서와 연결해서 시리즈로 보아야한다는 취지로 붙인 이름이다. 실제로 사도행전의 원제는 그냥 <행전>(Acts)이지 <사도행전>이 아니다. 누가복음의 시작은 데오빌로라는 로마 관료에게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서간체 형식으로 시작을 한다. 제일 끝에 가서는 그리스도께서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때까지 이 성에 멀물라”고 말씀하시고 그들을 떠나는 장면과 그들이 분부대로 그 성을 떠나지 않고 기다리는 장면으로 끝마친다. 그런 다음 <행전>이라 불리는 이 누가의 두 번째 책의 시작은 마찬가지로 데오빌로라는 관료를 수신자로 놓고 시작을 한다. 내용 면에서도 누가복음의 끝 장면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떠나지 말고…,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분부에 대한 회고로(행 1:4b-5) 시작하여 한 명이 빠진 12 제자에 대한 보충(1:12-26), 그 ‘약속하신 것’의 임재(2:1-13), 베드로의 첫 번재 설교에 나타난 권능(2:14-42), 믿는 자들의 공동생활(2:43-47), 베드로의 설교뿐 아니라 실제 신유로 나타난 권능(3:1-10), 그로 말미암은 박해(3:11-26), 공회에서의 대담한 논쟁(4:1-22), 공동생활의 두 번째 설명과 그에 대한 물적 인적 결실(4:32-37), 아나니아 삽비라의 저주(5:1-11), 계속되는 사도들의 권능(5:12-16), 사도에게 더해지는 박해(5:17-42)…, 그리고 아울러 바울의 등장과 바울의 로마 진입까지. 이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그의 복음이 세계적인 복음이 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역사적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이렇게 이 두 권을 정경으로서 누가의 복음과 행전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포스트 부활

성서가 역사 진술로 기록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언제까지나 무한 반복되는 게 아니라 시작, 중간, 끝이 명확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선 안 된다. 그 시작, 중간, 끝은 예수 자신이다. (계 1:8) 부활 이후의 역사가 이렇게 전개되었다.
 
 


 
 
모였다.

예수님이 떠난 즉시 초대교회가 취했던 행동은 “모였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2장 12절에 나오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거점이 되었을 것으로 유추하여 ‘마가의 다락방’으로 명명되는데 이곳에서 이들은 마음을 같이하고 오로지 기도에 힘썼다고 기록한다(행 1:14).
 
 
공동생활을 했다.

초대교회의 공동생활 범위가 어느 규모였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이 공동생활 대목은 후대에 공산주의를 비롯하여 물의를 일으킨 수많은 광신적 이단들이 오해했던 부분이다. 행전에서 가르치는 초대교회 공동생활의 핵심은 “서로 통용하고, 필요를 따라 나누고, 마음을 같이 하고, 모이기를 힘쓰고,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같이 먹으며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행 2-43-47; c.f. 4:32-37)이었다.
 
 
일곱을 새롭게 세웠다.

엄밀한 의미에서 열두 제자가 아닌 열둘(the twelve)이다. 일곱 집사가 아닌 일곱(the seven)이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역사적 이행을 상징한다. 열둘 가운데 한 명 가룟 유다가 낙오된 것처럼, 일곱 가운데 한 명인 니골라가 낙오되는 것까지도 일치하는 유비다.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스데반이 죽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사역을 보면 전반부에는 주로 사도들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중반부터 끝까지는 바울의 사역에 주로 관점이 맞춰져 있다. 스데반의 순교는 그 경계에 있다. 무엇을 시사할까.
 
 
에필로그 | 알파와 오메가.

부활, 그 최고의 결말이 났으면 멋지게 끝을 맺어야지 왜 열 둘에서 일곱으로…, 그리고 안타까운 스데반까지 죽어야 했던 것일까? 그래가지고서야 시작과 끝이라 할 수 있을까요? 길다 라드너(Gilda Radner)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Some stories don’t have a clear beginning, middle and end. Life is about not knowing, having to change, taking the moment and making the best of it, without knowing what’s going to happen next. Delicious ambiguity.”

즉 다른 말로 하면 삶이라고 하는 것은 “바뀌어 가는 것”, “잠깐 멈추어 쉬는 것”, 그리고 “그것의 최선을 만들어가는 것”, 이 명확한 세 가지 매듭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다만 그것이 우리에게 모호해 보이는 이유는 다음에 되어질 일을 알 수 없다는 그 사실 한 가지 때문이다.
 
 
* 2013년 4월 7일 부활주일 후 제 2일 | 부활의 이후에. | 행 5:27-32; 계 1:4-8, (c.f. 시 118:14-29 or 시 150; 요 20: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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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도상해석학과 신학의 지평융합: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후 해체시대의Post Secular 새교회 새목회 (2013). | Fb/@pentalogia Twtr/@pentalogia | You can add my to your circles. 로 연결해 보세요.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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