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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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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타주》해제 #10. 자석, 빵, 설교

      의심, 의심…, 하니까 자꾸 ‘믿음’ 떨어질 성 싶지만,

      이 책 부제가 ‘만들어진 신의 기원에 관하여’아니겠습니까?
      만들어진 신의 기원을 밝히려면 ‘의심’의 궤적을 살펴야만 합니다.

      의심은 이제 ‘이성’으로 변신할 것입니다.
      즉 ‘이성’이란 ‘의심’의 다른 말이며 그 내력은 다음과 같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나서는 모든 세계가 끝장 날 것 같았지만
      새로운 세계로 이행되었습니다. 쫓겨난 것입니다.

      카인이 동생을 죽였으면 그 자신도 끝장나야 마땅한데,
      에녹이라는 성을 쌓습니다.

      그 새로운 세계들은 사실상 하나님 안 계신 곳으로 변했지만,
      고대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안 계신 것(Atheism)이 아니라
      하나님이 떠나셨다는(Ichabod) 신학에 천착했습니다.
      그것이 창세기의 시작이 되었으며(“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임재(Parousia)라고 하는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띠게 되는 것입니다.
      [* 이 책의 진행 방향이기도 합니다.]

      한편, 루터가 중세교회의 종말을 고했다면,
      중세신학이 간섭하는 (중세)과학과의 결별은 데카르트가 고하였다고 했는데,
      특별히 ‘의심’을 통하여 그렇게 했다고 앞서 일렀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의심을 했냐면,
      내 몸에 달린 발가락도 의심하고,
      손가락도 의심하고
      사지 전체를 의심하되,
      단 한 가지만은 의심할 수가 없으니 그것이 무엇이냐ㅡ.

      바로 ‘생각하고 있는 나’,
      이 하나 만큼은 의심할 수 없더라ㅡ
      그러고는 저 유명한 테제를 선언합니다.

      Cogito, ergo sum(코기토 에르고 숨)
      라틴어인데 번역하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ㅡ입니다.

      이 말은 평범한 문장 같지만,
      “생각하고 있는 나만 존재(로 인정)한다.”
      라는 강력한 명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 외의 ‘나’는 비록 ‘나’ 자신이라 할지라도
      부정하겠다는 강력한 테제의 천명인 것입니다.

      이것은 데카르트 같은 천재만 주장한 것이 아니라
      평범하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같은 범인(凡人)도
      이러한 발상의 지배를 받기에 이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무턱 대고 믿습니까?
      소중한 딸이 아무나 따라 오라고 하면
      믿.고. 따라가라고 가르칩니까?
      뭐라 가르칩니까?
      우선 의.심.부터 하고 보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소중한 딸의 경우에만 그렇습니까?

      상거래에서는 어떻습니까ㅡ
      의심부터 하지 않습니까?
      의심 않는다구요?

      우리는 그것이 의심이라는 사실로 미처 인식도 하기 전에
      ‘부정 명제’로서 떠올리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많이 속아봐서가 아니라,
      우리의 뇌의 패턴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근/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자연과학의 법칙이 그렇기 때문입니다.

      이 법칙을 ‘공리’ 또는 ‘이성’이라고 부릅니다.
      불확실한 것을 모두 제하고
      가장 확실한 것만 남겨,
      바로 그것부터 믿는 방식인 거죠.
      이것을 다시 데카르트의 학명으로 바꾸어 상기하면,
      ‘방법적 회의’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 의심의 방법을 타고 ‘회의주의’라고 하는
      명실상부한 신론(神論)의 틀이
      서구 사회를 강타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니체가 잉태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전엔 어땠느냐?
      대부분의 사람은 “믿는다ㅡ”라고 하는
      이 메타피지컬한(철학적) 표현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사제가 떡을 떼어서
      “이것은 주님의 몸입니다. 받아먹으십시오.”(성찬)

      그런 다음,
      “주님이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하고 물으면

      사람들은
      (자신의 배를 가리키며) “여기요ㅡ”
      하는 정도의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떡이 (진짜로) 주님의 살/몸이 되었다고 하는
      카톨릭의 성체론이 달리 발달하게 된 게 아니겠죠?
      (온제 일일이 설명을 해~~)

      그렇다면 종교개혁자들의
      떡은 어떻습니까?

      종교개혁자들은
      떡(성체)이 주님의 몸(말씀)이 아니라,
      설교(말씀)가 바로 떡(성체)이라고 개혁했습니다.

      즉, 그것은 자연과학의 혁신과 평행하여
      자석에는 어떠한 영(혼)도 흐르지 않는 것처럼
      떡에도 주님의 몸은(성체) 실제로 흐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 대신
      자신들의 말(설교)에 그 빵 곧 예수님의 몸/살이 흐른다고
      신학의 전환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지금에 와서는 어떻습니까?
      결과적으로 이들 역시
      과거 자석에 어떤 영혼이 흐른다고 믿었던 것처럼
      떡에 주님의 몸이 흐른다고 믿었던 것처럼,
      자기들이 하는 ‘말’에 주님의 몸/살이 흐른다고 하지 않던가요?

      설교는 주님의 살입니까?
      인간의 말입니까?

      다시 말하면,
      개혁자들의 후예들이 오늘날의 설교를
      사실상 중세의 떡으로 회귀시켰다고 한다면,

      과거 자석에서 미신을 제거하고,
      떡에서 미신을 제거했듯,
      그들 사람의 말에 서린 미신을 제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미신을 싹 제거한 설교는 어떨까요?
      (다년간 제가 해보았습니다ㅡ)

      * 결국 위와 같은 진술은 ‘영원회귀’처럼 되고 말았지만, 그리하여 아래 #7 번 글에서 이르기를 믿음과 의심(이성)은 전혀 반대의 형식이지만, 언제나 함께 있을 수밖에 없게 된 것이라 했던 것입니다.

      * 이것이 아담을 통해 열린 새 세계이자, (만고의) 개혁자들이 열어 젖혀온 선악과, 즉 ‘지식을 알게 하는 나무’의 원리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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