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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584
    mim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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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몇 개로 이루어져 있는가? 영+혼+육? 영혼+육? 영+혼육?

      이 문제에 대해 다음 성경구절을 중심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여기서 ‘마음’, ‘목숨’, ‘뜻’을 유념하라.
      왜냐하면 영+혼+육? 영혼+육? 영+혼육? ― ‘나’의 구성을 밝혀주는 중요한 용례기 때문.

      현대인은 대개 ‘마음’, ‘목숨’, ‘뜻’―하면 다 비슷비슷한 걸로 여기지만
      이들은 명백히 다른 것이다.

      이 본문의 원형이 되는 신명기 6장 5절을 보면,

      ‘마음’, ‘목숨’, ‘뜻’―이 아니라
      ‘마음’, ‘성품’, ‘힘’―으로 되어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명기 6:5

      히브리어를 희랍어로 번역할 당시에
      여기서 한글 ‘마음’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레바브(לֵבָב)는 카르디아(καρδίας)로 번역되었다.
      마음이 아니라 심장인 것이다.
      그리고 ‘성품’으로 번역한 네페쉬(נָ֫פֶשׁ)는 프쉬케(ψυχῆς)로 번역되었다.
      성품이라기보다는 영혼인 것이다.
      끝으로 ‘힘’으로 번역한 메오드(מְאֹד)는 두나미스(δυνάμεώς)다.
      신약성서에서 두나미스는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권능’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마태는 왜 ‘힘’ 대신에 ‘뜻’이라고 바꿨을까?
      두나미스가 아닌 디아노이아(διανοίᾳ)를 쓰고 있는 것이다.
      디아노이아(διανοίᾳ)는 ‘뜻’이라기보다는 ‘마음’(Mind)에 해당하는 용어다.
      즉, 마태는 ‘힘’ 대신에 ‘마음’으로 바꾼 것이며,
      그 바람에 ‘마음·목숨·뜻’이 아닌, ‘마음·목숨·마음’이 되어 버리게 생긴 것이다(번역자 입장에서).

      따라서 마태의 본문은 다음과 같이 번역하는 것이 맞다.
      ‘심장’, ‘영혼’, ‘마음’

      마음과 심장이 오락가락 하거나 영혼과 성품이 오락가락하는 것은
      번역자들의 이미지 속에 이미
      영+혼+육? 또는 영혼+육? 또는 영+혼육?이 고착화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계몽주의/자연과학 사고가 명확히 들어선 번역자의 뇌리 속에는
      영과 육이 해부학적으로 완전히 분리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말에서도 heart를 꼭 신체의 장기기관으로만 여기지는 않듯이
      고대 히브리인에게는 영과 혼의 분리가 그렇게 명백하지 않았으며,
      헬라시대에 이르러서도 카르디아/심장은 이미 철학적 의미로서의 심장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당시에 그것은 적어도 누스(νοῦς) 곧 Mind와는 절대 구별된 신체의 기관이었다.
      이것이 마태가 누스라는 고양된 어휘로 교체한 결정적 이유다.

      사실은 마태보다 원형에 가까운 마가의 본문을 보면,

      신명기와 마태복음을 합친 듯,
      ‘마음, 목숨, 뜻, 힘’, 네 가지를 쓰고 있다.
      대신 여기서의 힘은 뒤나미스가 아니라,
      권세를 뜻하는 ἔχω의 관계어 이스쿠스(ἰσχύος)를 ‘힘’으로 쓰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가져볼 수 있다.
      ‘심장’, ‘영혼’, ‘마음(Mind/nous)’, ‘힘’(권능/권세)
      1. 이들 네 가지는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2. 이들 네 가지는 ‘영’에 거하는가? ‘혼’에 거하는가? ‘영혼’에 거하는가? 신체에 거하는가? 아니면 ‘뇌’에 거하는가?

      이것이 바로 ‘영+혼+육’ 혹은 ‘영혼+육’ 혹은 ‘영+혼육’을 똑 잘라서 규정할 수 없는 이유다.
      현대인은 현대의학 내지는 뇌과학을 지나치게 맹신하는 경향이 있다.

      끝으로 이걸 알아둘 필요가 있다.

      * 마가에 따르면 “너는 사랑하라 주 너의 그 하나님을
      너의 그 심장 전부에서 밖으로
      너의 그 영혼 전부에서 밖으로
      너의 그 힘 전부에서 밖으로“
      즉, 온 심장·영혼·힘으로부터 밖으로 사랑을 뻗쳐나가고 있다.

      (ἐξ ὅλης τῆς καρδίας σου
      καὶ ἐξ ὅλης τῆς ψυχῆς σου
      καὶ ἐξ ὅλης τῆς διανοίας σου καὶ ἐξ ὅλης τῆς ἰσχύος σου)εκ + 속격

      * 반면 마태는 “너는 주님을 그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너의 그 심장 전부 안으로
      그리고 너의 그 영혼 전부 안으로
      그리고 너의 그 마음 전부 안으로“

      (ὁ δὲ ἔφη αὐτῷ Ἀγαπήσεις κύριον τὸν Θεόν σου
      ἐν ὅλῃ τῇ καρδίᾳ σου
      καὶ ἐν ὅλῃ τῇ ψυχῇ σου
      καὶ ἐν ὅλῃ τῇ διανοίᾳ σου.)εν 여격

      * 즉, 마가(신명기)는 ‘나’로부터 밖으로 사랑을 가했다면,
      마태는 ‘나’ 안으로 사랑을 강타하고 있다 하겠다.

      #3585
      YOUNG JIN LEE
      키 마스터

        이 문제와 연하여 ‘(다른)동물에게도 영혼이 있는가?’라는 논지에 관하여:

        전도서 3장 21절에서 거두겠다는 (영)혼은
        ‘영혼’이 아니라 19절에서 언급한 ‘호흡’이다.
        본래는 둘 다 ‘바람'(רוּחַ/πνεύμα)인 것을 그리 번역한 것뿐이다.
        이 호흡/바람을 어디서 받았느냐ㅡ
        바로 창세기 2장.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은 하나님의 호흡을 받아 네페쉬가 되고 동물은 사람에게 이름을 받아 네페쉬가 되고,
        둘다 똑같이 네페쉬가 되었는데
        이 네페쉬(נֶפֶש)를 영혼(ψυχή)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에게 영혼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말이다.
        영혼이 없다고 하지를 말든지,
        아니면 Mind(νοῦς)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카톨릭의 경우는 아퀴나스 덕택에 자연에 대한 비교적 너른 이해를 유지하였으나,
        개혁자들은 교의학을 재정비하느라 여념이 없어서인지 자연/생태 이해를 조직신학 속에 봉인시킨 일면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에
        아무 가책없이 보신탕도 잘 먹고 하는 것이다.
        어쨌든 동물에게 ‘영혼이 없다’는 발언은 대단히 무지한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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