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드러내는 방식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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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를 드러내는 방식에 관하여


프롤로그 | 백의종군(白衣從軍)

이순신은 역사적으로 두 번의 백의종군을 한다. 선조 20년(1587), 여진족이 침입해 많은 양민을 학살할 때 적은 병력으로 변변한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싸워 포로 잡힌 60여 명을 되찾았으나, 싸우지도 않고 미리 도망친 직속상관 이일의 모함으로 병영이 와해된 것만 추궁받아 백의종군 하게 되는 것이 그 첫 번째다. 다음은 학익진(포위섬멸 전술 형태)으로 유명한 한산도대첩 후, 원균과의 갈등에서 야기된다. 1593년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자 이순신 수하로 내려 앉게 생긴 원균이 반발해 반목하다가 원균의 유언비어로 1597년 해임되어 원균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한성으로 압송되어 음력 3월4일 투옥된 것이다. 우의정 정탁(鄭琢)의 상소로 음력 4월1일에 사형은 모면했으나 도원수 권율(權慄) 밑에서 말단 군사로 종사하라 하니, 이것이 두 번째 백의종군이었다. 
우리사회는 70년대에는 정권 차원으로 충(忠)의 화신으로 과도하게 그를 숭배하게 했고, 80년대에는 이에 대한 반동으로 원균 복권 작업에 흥미를 쏟다가, 90년대 들어서는 자살설·은둔설과 같은 그에 대한 미스터리가 하나의 트랜드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화려한 무훈과 백의종군이라는 이율배반적 현실 속에서 나라를 지켜낸 그의 진정한 모습은 바로 다음 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그의 내면뿐일 것이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프린서플 | 현재를 드러내는 방식

역사라고 하는 것은 정지되어 있는 결정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는 유기체라 보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과거에 대해 그 어떠한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고 배워왔지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무엇보다 과거로부터 막대한 영향을 받으며 현재를 살아가며, 엄밀한 의미에서 미래 또한 현재의 결과라는 점에서 그 미래 또한 과거라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순신 장군을 보는 시각이 시대의 필요에 따라 그렇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일반 역사와는 좀 다른 방식으로 과거와의 관계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현재를 과거에 비춘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으로 하는 귀환 공동체들이 과거와 완전히 분리된 미래 집단이었다고 한다면 그들은 굳이 팔레스틴으로 돌아올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7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절대자와의 신뢰를 바탕으로 공직에까지 오를 정도의 디아스포라 공동체를 구축했는데도 거기서 정지하지 않고 철저하게 과거를 비추어내는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이미 1장에서 하나님 말씀을 마주 대하고 있습니다(느 1:8-9).
귀환을 감행한 이후 여러 우여곡절 끝에 귀환자들이 다함께 모인 자리에서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꺼내와서 읽어달라고 주문합니다. 그때에 그들은 이렇게 과거를 비추었습니다. 에스라가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1) 일어섰으며, 그가 송축할 때에 (2) 아멘 아멘 응답하였으며, 곧 (3)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경배했습니다. 어떤 새긴 상에다 대고 경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들은 말’에 대한 반응으로서 경배였음에 주목합니다. 이런 식으로 그들의 현재를 드러냈습니다.
현재가 과거에 응한다.
예수님께서 현재를 드러내는 방식은 이들과도 좀 달랐습니다. 본문 누가복음의 주님은 시험을 받으신 직후 갈릴리 회당으로 순회를 하셨는데, 그 중에 나사렛의 한 회당에 이르러 성경을 읽으십니다. (마치 에스라처럼.) 그리고는 곧 책을 덮으시고 도로 돌려주십니다. (에스라와는 달리.) 그리고는 그 말씀이 “귀에 응했다”고 하십니다. 귀에 응했다라는 것은 무슨 말일까? 에스라-느헤미야의 현장에서는 ‘들은’ 말에 대한 반응으로서 예배이지만 주님이 계신 곳에서는 그 자체로서 가득찬(플레로오) 상태를 말합니다.
그것은 과거에 비추어 현실을 드러내는 방식과는 달리, 현재 위에다가 과거의 약속된 바를 일일이 직접 실천해내는 극단적인 성취 형태를 말합니다. 

에필로그 | 성취란

우리는 애를 끊는 듯한 신념으로 현재를 지킬 수도 있고, 철저하게 과거를 비춤으로서 현재를 드러낼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하신 바와 같이 기록된 대로 우리가 직접 일일이 일으켜 세우는 태도일 것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는 과거가 가득 채워졌을 때 도래할 수 있습니다. 채워지지 않은 현재는 과거이며, 미래도 이런 식으로 소급 당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과거와 미래를 현재로 정지시키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come true) 라는 말은 지금 이 자리에 당장 “가득차 있다”(플레로오) 라는 말 입니다. 그렇게 과거를 붕괴(telos) 시켜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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