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습 예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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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습 예찬

프롤로그 | 세습 가치

(전략) 시기가 작용하면 마귀만 좋아하고 교회는 성장하지 못합니다. 아버지 목사가 은퇴하고 아들이 담임자가 되면 “세습”이라고 공격하고 비난합니다. (중략) 좌파들은 북한의 3대 세습은 한마디도 하지 않으면서, 교회의 정당한 후임자는 세습이라고 비난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목사도 성직자이지만, 육성을 갖고 있는지라 자기보다 훌륭하고 설교 잘하는 후임자가 들어오면, 잘해도 불편하고 못해도 불편합니다. 시기심이 작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당회나 총회에서 합당하다고 결의되면, 아들 아니면 사위라도 후임자가 되면 아들이 설교할 때 교인들이 은혜 받으면 아버지 마음이 흐뭇하고, 아버지가 존경받고 사랑받으면 아들도 싫지 않습니다. 뒷받침해주니까 힘이 되고 안전합니다. 아버지는 “나는 지는 해이요, 아들은 뜨는 해니까 아들이 존경받아야지” 또는 “저는 흥 해야 하고 나는 쇠해야 하겠노라” 하는 심정으로 시기를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전혀 관계없는 사람이 후임자가 되면, 서로 시기하기 때문에 교회가 편할 수 없습니다. (중략) 지난 몇 년 동안 감리교단에서 감독회장을 뽑지 못하고 파행을 거듭해 왔던 것도 한 마디로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왜 한 가문에서 “김선도, 김홍도, 김국도가 다 감독회장을 해먹게 두느냐”고 총회 전부터 방해하다가, 44% 가까운 득표를 했음에도 억지 방해 공작으로 취임을 못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사울의 집과 다윗의 집 사이에 전쟁이 오래매 다윗은 점점 강하여 가고 사울의 집은 점점 약하여 가니라” 한 말씀대로 되어가고 있다고 봅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후략). <9월7일자 조선일보 22면 전면광고>


프린서플 | 세습 예찬: 십자가를 승계함

한국 현대 불교 최고 선승 가운데 하나로 추앙받던 승려 성철(性澈·1912-93)에게 속가(俗家)의 딸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훗날 아버지의 권유로 같은 길을 걷게 되는 그녀가(不必·75) 세간에 더욱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를 그녀의 회고에서 엿볼 수 있다.

“출가 얼마 후 더 이상 아버지가 아닌 성철 큰스님이 ‘앞으로 어떤 도인이 되겠느냐’고 물었다. 숨어 사는 도인은 중근기(中根機·중간 정도의 자질), 중생을 제도하는 도인은 명리승(名利僧), ‘내 떡 사소’ 하는 도인은 가장 하근기,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도인은 상근기라고 하면서다. 숨어 사는 도인이 되겠다고 했다. 심산유곡에서 감자나 캐어 먹는 못난 중노릇을 하고 싶었다. 울산 석남사 주지 자리를 마다한 것도 그때의 결심 때문이다.” <9월19일자 중앙일보>

‘광고’ 한 편과 ‘회고’ 한 대목만 가지고서 무엇이 어떻다 비교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여기 불가에서 언급된 이른바 상·중·하근기, 그리고 명리승과 같은 수행의 단계나 구분에서 만큼은 여러모로 비교도 되고 대조도 된다.

사실 529년경 베네딕트에게서 발화되었던 청빈·정결·순명 세 덕목을 기치로 한 수도원 운동이 세월이 흘러 쇠퇴해가는 와중에서도 도미니크(1170-1221)는 학문의 실천을 통한 수도로써, 프랜시스(1182-1226)는 가난의 실천을 통한 수도로서 갱신을 주도하고 예수님을 본받는 그 기치를 이어갔다. 그러한 덕과 수행의 전개는 외국에서만 있었던 건 아니다. 짧은 기독교사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도 이미 작은 예수요 살아 있는 성자로 불리는 장기려, 가난한 종지기 권정생, 기독교 지도자들의 스승 유영모, 청년의 민족혼을 일깨운 김교신, 한국의 모세라 불리는 김약연, 사랑으로 농촌을 깨운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 살과 피를 모두 주고 간 거룩한 기업가 유일한, 모든 걸 나누고 비운 도암의 성자 이세종, 아홉 자식을 가슴에 묻은 구도자 수레기어머니 손임순, 걸인과 고아를 섬긴 맨발의 성자 이현필, 무등산으로 떠난 나환우의 아버지 최흥종, 거지대장이 된 애꾸눈 거두리 이보한, 우리 곁에 잠시 머문 눈물의 성자 방애인…, 이들은 모두 작금의 현대 기독교에 와서 큰 인기를 누리지 못해 그렇지 한 마디로 상근기 도인과 같은 인물들이다. 그것은 스스로 어떤 도를 깨우치겠다는 단지 자기구도(求道)에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리스도의 삶처럼 실천하고 엮어나가는 기본 정신을 토대로 한다. 본문에서 주님은 그 삶의 방식을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첫째, 자기를 부인하라 (Deny).
단순한 은둔이나 학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양보를 이르는 말이다.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라 (Lift up).
남의 십자가가 아니라 자기 십자가이다. 자기 삶의 회피가 아닌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애와 교착지이기도 하다.

셋째, 주님을 따르라 (Follow).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구도의 진행형을 말한다.

에필로그 | 기원을 알 수 없는 현대종교 현상

한 불교인이 회고한 속가 부친으로부터 승계 받았다는 수행기는 청빈·정결 면에서는 유사하나 자기구도에 편중되었다는 점에서 그리스도교와 다르다. 그러나 금번 일간지 광고에 나타난 현대 개신교회 세습의 가치는 수행이나 구도가 아닌 권한/권력 승계에 편중되었다는 점에서 불교의 그것과도 다르지만 정통 그리스도교 형식과도 전혀 다르다. 그것은 단지 토착화된 한국 개신교 내의 현대종교 현상이라는 점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 아내도 자식도 없었다는 그 단순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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