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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에 대한 신앙적 진술>

하나님께서 오늘 새벽에 꿈을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꿈에서 내가 스케이트를 받아 신고 탑니다. 그러나 앞으로 잘 나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얼음을 지치는데 날이 미끄러워 잘 지쳐지지 않는 것입니다. 스케이트 날을 만져보니 각각 반대쪽에는 날이 쓸 만한데…, 신발을 바꿔 신고 있습니다. (신발이 미끄러워 좌우를 바꿔 신어야 하는 것인지 좌우 신발을 바꿔 신어서 미끄러운 것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 부분에서는 의식이 돌아왔기 때문에.)

<꿈에 대한 신앙적 해석>
// 스포츠 중에 스케이트는 내가 유일하게 잘 할 수 있는 스포츠입니다. 빠르게 달리는 것보다는 아름답게 또는 박력 있게 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아이스하키 또는 피겨 스케이트를 선호합니다.
// 유리한 종목으로 잘 할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날이 미끄러운 것은, 그리고 그것을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 속에서 스케이트 신발을 “좌우 바꿔 신었다.”고 확정한 것은 “순서가 바뀌었다”는 계시로 받아들입니다.
// 그 순서가 바뀐 대상은 바로 “기도”라고 결론을 맺습니다.
// 아무리 잘 하는 종목으로 한다 해도 기도로 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인가 봅니다. 

[*그림설명: 일어나자 마자 그린 그림. 꿈에는 명확하게 피겨였음. 좌우를 더욱 헷갈리게 하는 그것 피겨]

꿈은 과연 계시인가?
<심리론>에서는, 꿈은 심리이지 계시일 수 없다. 융이 다소 신적 계시 가능성을 타진했다고는 하지만 신앙인들이 말하는 그 하나님을 염두에 둔 게 아니다. 

계시로서 꿈을 원천적으로 봉쇄한다고 봐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꿈은 전제의 산물 아니겠는가? 내가 스케이트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스케이트 꿈을 꾸겠으며, 그리고 그 날(blade)에 관한 경험이 없다면 어떻게 무딘 날이 전진하는데 있어 장애인 줄 알겠는가? 심지어 그 경험의 한계를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태고> 시절까지 소급해 확장해놓는다. <태고>의 경험으로도 부족한 전제 영역을 더 나아가 <신의 영역>으로까지 소급하여 열어 놓았던 것. 그것이 바로 융의 신론(神論)이다. (그러므로 신앙적 신 개념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이 전제로 그려질 수 있다 하더라도 그 전제를 “바꿔 놓으라(바꿔 신으라)”는 파라독스 명령자는 나를 넘어서는 영역이다. 꿈의 재료를 경험했던 “나”가 있다. 꿈을 지어낸 “나”가 따로 또 있다. 이 양자가 자기 나름대로 재료를 구성/재구성 하지만, 그 최종적인 결과물을 깨고 (반대로) 계시하는 계시자(revealer)로서 “나”가 완전히 별개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가 ‘둘 이상’이라고 일러 두었던 것이다.

그러면 꿈은 그리스도인만 꾸느냐, 꿈으로 된 그런 계시는 불신자에게는 없느냐. 물론 그들에게도 그런 계시가 있다. (만물 가운데 신성이기에.)

다만, 그 계시가 진리가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그 계시가 (자기가 미처 모르는) 무의식에 거치되었다 안되었다로 정합성이 판가름 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말씀을 받은 자인가 아닌가 라는 정점에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르트가 말하기를, “제1의적 계시를 예수에,” “제2의적 계시를 성경,” “제3의적 계시를 설교에”인 것이다.

요셉의 꿈은 꿈이기 때문에 계시인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통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길을 깔았기 때문에 계시인 것이며, 느부갓네살의 꿈도 그것이 그의 꿈일 때에 계시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길을 까는 다니엘이 해석을 내릴 때에 계시가 정립되는 이치라 하겠다.

그래서 이 스케이트 꿈에서 “바꿔 신었다”는 판단이 무의식이었는지 의식이었는지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하였다. 어차피 최종 계시로서 판단은 말씀(성경)을 받은 “나”가 하는 것이고, 모든 질료와 형식이 이 말씀으로 재편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꿈을 통한 계시로서 형식이며 여기서 지나는 것은 모두 상상력의 범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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