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사순절 (1/40)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 91명의 독자가 공감하셨습니다 

2016 사순절 (1/40)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언제나 아전인수(我田引水)를 하게 마련인데.

 

매일묵상/ 2016년 2월 11일 목요일

 
본문:

1 크게 외치라 목소리를 아끼지 말라 네 목소리를 나팔 같이 높여 내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야곱의 집에 그들의 죄를 알리라
2 그들이 날마다 나를 찾아 나의 길 알기를 즐거워함이 마치 공의를 행하여 그의 하나님의 규례를 저버리지 아니하는 나라 같아서 의로운 판단을 내게 구하며 하나님과 가까이 하기를 즐거워하는도다
3 우리가 금식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보지 아니하시오며 우리가 마음을 괴롭게 하되 어찌하여 주께서 알아 주지 아니하시나이까 보라 너희가 금식하는 날에 오락을 구하며 1)온갖 일을 시키는도다
4 보라 너희가 금식하면서 논쟁하며 다투며 악한 주먹으로 치는도다 너희가 오늘 금식하는 것은 너희의 목소리를 상달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니라
5 이것이 어찌 내가 기뻐하는 금식이 되겠으며 이것이 어찌 사람이 자기의 마음을 괴롭게 하는 날이 되겠느냐 그의 머리를 갈대 같이 숙이고 굵은 베와 재를 펴는 것을 어찌 금식이라 하겠으며 여호와께 열납될 날이라 하겠느냐
6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7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또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네 빛이 새벽 같이 비칠 것이며 네 치유가 급속할 것이며 네 공의가 네 앞에 행하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뒤에 호위하리니
9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
만일 네가 너희 중에서 멍에와 손가락질과 허망한 말을 제하여 버리고
10 주린 자에게 네 심정이 동하며 괴로워하는 자의 심정을 만족하게 하면 네 빛이 흑암 중에서 떠올라 네 어둠이 낮과 같이 될 것이며
11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
12 네게서 날 자들이 오래 황폐된 곳들을 다시 세울 것이며 너는 역대의 파괴된 기초를 쌓으리니 너를 일컬어 무너진 데를 보수하는 자라 할 것이며 길을 수축하여 거할 곳이 되게 하는 자라 하리라

ㅡ이사야 58:1-12.

 
관찰:

1. 마치 공의를 행하여 (2절)
2.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6절)

 
묵상:

3.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느낀점:

4.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가 “공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공의를” 행하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은 두려운 노릇이다.

 
해설:

5. 난생처음 경기도에 있는 한 기도원을 찾았다.
그 기도원은 ‘금식 기도원’이었다.
초신자 시절 누군가 나를 그곳으로 인도하였을 것이다.
저녁이 되어 나는 ‘식당’이라는 팻말을 보고 부리나케 그곳에 들어섰다.
아마도 당시에 한 두 끼니를 굶었을 것인데, 누추하기 짝이 없는 그 기도원 식당이 얼마나 아늑하고 설레이던지…
그런데 초라한 배식 창구 옆에는 흰색 종이에 빨간 매직으로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6절)

기도원이라는 곳도 난생처음이지만, 그곳에서 이 유명한 구절을 처음 맞닥뜨린 것이다.

어쩌라는 것인지.
밥을 사 먹으라는 것인지, 말라는 것인지.
그럼 왜 ‘식당’이라고 써놔.
(나중에 안 것인데 그 식당은 나 처럼 ‘뭐 먹을 거 없나?’ 하는 사람이 사먹는 식당이 아니라 10일, 20일, 3-40일 금식한 사람이 보호식을 먹는 식당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말씀이 그 때 벽에서 본 상태 그대로 (흰 벽과 함께) 기억되고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 예리하여 내 관절과 골수에 박힌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 당시에
“…흉악한 결박…” 이란 미친 사람의 정신을 연상했던 것 같다.
거기서 조금 더 해석을 해서
‘아하, 부도 맞은 사람의 부도…?’ 하고 유추까지도 했던 것 같다.
그런가 하면 바람 난 아내를 돌아오게 하려고 금식을 하는 사람에게는
바람 난 아내를 꼬신 놈이 ‘흉악한 결박’이겠구나ㅡ 라는 의미에까지도 다다랐던 것 같다. 초신자임에도 대견.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니
여기에 등장을 하는 ‘금식하는 사람들’의 금식에는
어떤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대개 정의를 행한다고 하였는데,
하나님께서 생각하실 때
사람을 결박하고 있는 그 (금식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와서 자신의 결박을 풀어달라고 정의를 말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말이 있을 지는 당시 그 누추한 기도원 식당을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선 초신자로서는
알 도리가 있었어야지…

이 묵상을 기록하고 있는 지금은 북한 미사일 발사에 대한 대응으로 정부가 ‘개성 공단 (영구) 폐쇄’을 결정한 직후다. 이 본문을 그 현실에 적용한다고 했을 때,
어떤 사람은 “흉악의 결박”을 ‘바람난 아내’로, 어떤 사람은 ‘자기 사업의 부도’로 보듯이, 자기 생각과 이념에 따라 정의로운 금식을 정의 하겠으나 ㅡ 가령, 개성공단 폐쇄를 풀라??? 아니면 개성공단을 폐쇄해 남한의 결박을 풀라??? ㅡ 이 “흉악의 결박”의 정당한 적용은 언제나 ‘나 자신’부터다.

내가 현재 억압하고 있는 사람 또는 사물은 누구인가…이다.
그랬다면 금식의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기들 직원에게는 인색한 사람이 교회에서는 인자한 장로.
이를테면 교인들을 신앙과 훈련의 이름으로 억압하는 목사가 자기 자녀에게는 무한한 자유를~

이런 자의 금식이 효력 없다는 것이다.

 
결단과 적용:

6. 내가 가정에서 예배하는 작은 교회를 설립한 것은,
오갈 데가 없어 가정에다가 꾸린 것이 아니다.
같은 그리스도인을 억압하고 압제하지 않기 위해서 그리하였던 것이다.
아니, 그리스도인을 억압하지 않으려다 보니
오갈 데가 없어 가정을 못 벗어나고 있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네.

공간의 한계를 뛰어 넘지 못하는 4년차 현재
억압하지 않는 내가 틀린 건가?? 하는 생각이 잠깐씩 스치는 건 사실이다.

 
기도:

7. 나― 억압하지 않게 하소서.
너― 자유케 하소서.
우리― 자유의 참 뜻을 알게 하소서.

 

cf. Lectionary, Ash Wednesday (February 10, 2016): Joel 2:1-2, 12-17 or Isaiah 58:1-12; Psalm 51:1-17; 2 Corinthians 5:20b-6:10; Matthew 6:1-6, 16-21.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Comments

comments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Mi Moon (美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