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거인―대한민국 퇴행에 관한 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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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격의 거인―대한민국 퇴행에 관한 소고

L’attaque des Titans

이 글은 일본 만화 <진격의 거인>에 담긴 기호와 해석을 다룬 글이다. 더 정확히는 <진격의 거인>을 통해서 보는 현대인의 섭식 행태, 그리고 그것이 미치는 사회 현상에 관한 담론이다. 다음 네 단계로 정리하였다.

첫째, 만화인가 서사인가, ‘진격의 거인’.
둘째, 오락인가 본성인가, ‘먹방’.
셋째, 식인인가 섭식인가, ‘카니발리즘’.
넷째, 작물화인가 가축화인가, ‘민주주의’.

1) 만화인가 서사인가, ‘진격의 거인’

미국 만화는 초창기 월트 디즈니의 상업적 성공에 힘입어 영화 중간의 삽화 수준이던 만화를 총천연색 장편 영상물로까지 도약시켰고, 스티브 잡스라는 거장을 만나 입체만화로 기술적 도약을 이룩하면서는 영화와 만화 사이의 장벽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이후 워너브라더스(영화사)가 DC코믹스를 인수함에 따라 월트 디즈니사는 경쟁적으로 마블사를 인수하였는데 그 결과가 <어벤져스>, <아이언맨>, <배트맨>, <슈퍼맨>, <원더우먼> 등 영화인지 만화인지 경계를 허문 실사판 만화이다. 상대적으로 <미녀와 야수>나 <알라딘>처럼 서정적이고 부드러운 동화 이미지는 월트 디즈니가 독점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으나, 마블사나 DC코믹스 같은 평면만화 업자와의 합병은 소재의 빈곤을 드러낸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엄밀한 의미에서 ‘미녀와 야수’나 ‘알라딘’은 이미 미국산 이야기가 아니며 다양한 영웅들 역시 상당수 북유럽 신화 주인공이라는 점에서 미국 전통의 이미지로서는 극히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미국 만화는 기술집약적으로 발전한 산업으로서 애니메이션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카툰 어벤저스
실사 어벤저스

이에 반해 일본 애니메이션은 스티브 잡스의 <토이 스토리>나 월트 디즈니의 <알라딘> 같은 기술적 측면이 아닌 서사적 측면에서 압도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가령 <너의 이름은>, <갓파쿠>, <원령공주>, <하울의 움직이는 성>… 헤아릴 수 없는 명작들은 일본이라는 고립된 섬에서 겪는 지엽적 재앙(화산 또는 지진)이 어떻게 세계적인 환경의 의미로 극대화될 수 있는지 인간의 깊은 내면적 유대와 관계 속에서 성공적으로 묘사한다. 그런가 하면 <신세기 에반게리온>(이하 에반게리온) 같이 서구의 문명과 사조를 일본 특유의 고립된 내면 구조 속에 넣고 완전히 해체했다 재조립해 세계 시장에 다시 내놓은 작품도 있다. 이런 작품에 나타나는 고도로 개성화된 특유의 고립감은 고립된 섬나라 환경에 기인해서인지 특정할 수는 없으나 특유의 개인화된 서사로 탈바꿈시키는데 능하다는 점에서 기술집약적 미국산 애니메이션을 압도한다.

이를 테면 <에반게리온>에는 ‘시토’라는 존재들이 등장한다. 시토는 사도(使徒)의 일본어 독음이다. 이 시토에 대한 절묘한 묘사를 원작자 안노 히데야키 개인의 고립성으로만 치부하기에는 참으로 탁월한 서사인데, 어느 신학자보다 탁월한 ‘사도’ 이해를 발현하기 때문이다. 이 애니메이션에 따르면 대체 어디서 보냈는지, 왜 보냈는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나타나는 존재가 시토들이다. 제거해도 계속 보내온다. 아무리 제거해도 그치지 않고 계속 보냄을 받아 출현하는 것이 바로 이들 ‘시토’라는 존재이다. 그냥 그런 것이 ‘시토’이다. 그런 점에서 ‘사도’ 즉 아포스톨로스(απόστολος) 본성에 관한 탁월한 이해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단지 몇 명만이 사도라 주장하거나 심지어 현대 들어 부쩍 단 몇 명이서 자신을 ‘신’사도라 참칭하는 주장이 명백하게 오류임을 조명하기 때문이다.

신세기 에반게리온 포스터

하지만 여기서 출현하는 사도는 반대편 거악으로서, 우리는 반대의 입장에서 형식상의 우리 사도와 직면할 수밖에 없기에 거기서 빚는 생경함은 주로 정의로운 폭력을 행사하는 미국식 영웅의 폭력과는 다른 양상의 폭력을 경험케 된다. 익숙하고 무뎌진 종래의 정의(定義)가 반대의 입장에서 더욱 효과적 인식으로 상쇄되는 이러한 현상을 길항작용(拮抗, antagonism)이라 규정한다면, 바로 이 작용이 <에반게리온> 같은 고립성 일본 애니메이션의 서사를 주도하는 것이다.

오늘 소개하려는 <진격의 거인>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에반게리온>과 유사한 규모의 서사 구조를 공유한다. 하나는 종말, 다른 하나는 식인(食人)이다. 특히 식인은 전자인 종말을 향해 치닫는 연속관계의 고리로서 주된 행동 양태이다. <에반게리온>에서는 사도에 대항하려고 만든 생체 로봇 에반게리온이 같은 유전자를 지닌 사도를 물어뜯어 먹음으로 자기 각성을 일으켰다면, <진격의 거인>에서의 식인은 모든 문제를 잇는 행위의 연쇄이다. 거악에 공격받는 행위도 식인이지만, 그 거악을 방어하거나 상쇄시키는 행위도 식인이라는 점에서 길항작용이 더욱 충만하게 발전한 이야기라 하겠다.

Evangelion cannibalism

바로 이 <진격의 거인>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던지는 통찰이 있다.

식인 행위는 우리 사회 여러 면에서의 표본으로 남아 맹위를 떨치고 있는데 우리의 사고, 행동 양식, 관습 따위를 고도로 관념화해내는 모종의 길항체(antagonist)로서 현존한다는 사실이다. 저 끔찍한 식인 풍습은 악습으로 규정 받아 비록 오늘날은 사라져 관습의 터에 흔적으로만 남아 있으나, 그것은 비단 고고학 따위의 단층에서만 찾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매우 깊숙하고도 교활한 방식으로 우리와 근접 거리에서 관념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 관념을 운영하는 형식이 <진격의 거인>에 아주 잘 보전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진격의 거인>은 명백하게 서사(敍事)라 할 수 있는데 ‘서사’란 만화로 치면 일종의 ‘실사’란 뜻이다. 아울러 현대인의 관념에 남아 상쇄작용을 일으키는 저 식인 앤터고니즘의 표본을 지금 당장 여기서 지목할 수 있다. 이 시대에 ‘먹는 것’을 주제로 삼는 모든 콘텐츠 행위, 흔히 우리가 ‘먹방’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2) 오락인가 본성인가, ‘먹방’

먹방은 ‘먹는’, ‘방송’이라는 신조어이다. 이 ‘먹는 방송’이 소셜 미디어를 점령해 국민의 비만율을 높이고 있다며 ‘규제해야 한다’는 이상한 정책 방안을 정부가 공론화할 정도로 먹방은 우리 사회에 일반화된 신종 문화다.

물론 한국은 ‘먹방’의 발상지도 아니며 한국만의 현상도 아니다. 미국 푸드파이터 대회 1위 경력의 맷 스토니라는 유튜버는 구독자가 1천만 명에 달하며, 쇼 일회당 1만 칼로리를 먹는 것으로 알려진 아담 모란은 신사의 나라 영국 사람이다. 작은 체구의 일본 여성 키노시타 유카는 무려 520만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그녀는 이미 2014년 우리나라 TV 프로그램 출연해 카레 30인분, 햄버거 30개, 우동 10그릇을 먹어 보인 유명 푸드 파이터이다.

우리나라에서 먹방은 아프리카 TV에서 선보인 이래 콘텐츠가 유튜브로 대거 이동하면서 스물두 개의 라면을 먹어 치우는 모습을 송출해 단번에 십만 여명의 구독자를 얻은 유튜버가 있는가 하면, 이 ‘먹는 방송’ 한 가지로 300만 이상의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도 등장했다. 비교적 후발 주자임에도 성장 규모 면에서 가파른 상승세를 그리는 한국식 먹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정부까지 나서 규제하려 했던 대목도 그렇지만 ‘먹방’이라는 한글 신조어가 아예 해외에서 외국인이 올리는 먹방 영상에서조차 영어 ‘Mukbang’으로 명명될 정도로 한국식 먹방은 독특한 면이 있기 때문이다.

Mukbang이라고 표기한 미국인 유튜버

카메라를 설치해두고 근접 거리에서 카메라를 바라보며 서양인처럼 산처럼 쌓아놓은 엄청난 양의 음식을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때까지 ‘양’으로 승부하거나, 얼마나 빨리 먹느냐 ‘속도’로 승부하는 정도가 먹방의 전형이지만 유독 한국인 먹방이 흥미를 끄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나라 먹방은 ‘보는 먹방’인 반면 우리 먹방은 ‘소리의 먹방’이기 때문이라는 분석을 본 일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는 제아무리 양과 속도에 맞추어 자극하더라도 먹는 장면만큼은 놀라는 표정 내지 만족하는 표정 정도의 묘사에 그치고 직접 묘사를 피하지만, 우리는 먹는 소리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서양인은 먹는 자리에서 자기들은 코도 풀면서 먹을 때 입에서 내는 소리에는 극도의 혐오를 드러내는 경향이 있다. 후루룩 쩝쩝 입속에서 나는 소리의 혐오에 흥행비결이 있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러한 혐오를 동반하는 먹방은 분명 흥미로운 볼거리일 수 있지만 적어도 한국인에게 먹방의 의미는 그런 단편적인 것이 아니다.

한국 먹방은 한마디로 ‘무엇을 먹는가’에 그 식성이 몰려 있다. 여기서 ‘무엇을 먹는가’라는 명제는 단지 어떤 청결하고 고급스러운 음식에 대한 지향성이 아니다.

맷 스토니나 키노시타 유카 같은 외국 유튜버가 우리나라 음식에 도전했을 때 ‘무엇을 먹을까’ 고른 메뉴는 매운 음식이었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 ‘불닭볶음면’이라는 인스턴트에 도전했는데, 그 이름을 보면 단지 맵기로 작정한 음식이다. 음식이 갖는 다른 본질은 없다. 정크 푸드란 본래 그런 것이지 싶겠지만 ‘무엇을 먹는가’라는 이 식성은 불닭볶음에만 그치는 게 아니다. ‘삶은 돼지머리에서 혀 뽑아 먹기’, ‘낙지 통째로 먹기’… 등 헤비 유튜버들이 고르고 수많은 대중이 열광하는 이 괴식들은 인스탄트 음식이 아니다.

불닭복음면을 먹는 맷 스토니

그러므로 그 식성은 철저한 괴식에 있다 할 것이다. 그러나 외국인을 경악시키는 저런 괴식은 엄밀한 의미에서 괴식이라기보다는 우리의 흔한 잡식이기도 하다. 먹방이 왜 폭발적 인기를 끌게 되었는지 그 동인에 관하여 이르기를, ‘현대인의 가족 단위 파괴’, 그리고 거기서 야기 된 ‘외로움’으로 누군가와 함께 식사하고픈 욕망이 먹방을 탄생시켰노라는 서정적 해설들도 눈에 띈다. 그러나 누군가와 함께 식사할 때 삶은 돼지머리에서 혀를 뽑아 먹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따라서 ‘무엇을 먹는가’라는 문제는 더욱 넓은 의미의 식습성을 포괄한다.

한국인은 대체 무엇이 먹고 싶은 것일까?

‘어떻게 먹을 것인가’ 또는 ‘왜 먹는 것인가’보다 ‘무엇을 먹는가’라는 식성은 강력한 집단성을 전제한다. 어떻게/ 왜 먹느냐보다는 ‘무엇을 먹는가’에 극도의 예민함을 보이기 때문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무엇을 먹는가’라는 식성이 발현시키는 이 집단성은 먹방에서의 경우 ‘무엇이든 먹어 치우겠다’는 집단성으로 나타나지만, 그것이 길항체로 작용하여 강력한 앤타고니즘으로 발현하였을 때는 파괴적인 동물성을 일으키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앤타고니즘을 우리는 이른바 ‘광우병 사태’ 때 목격한 바 있다.

‘삶은 소/돼지머리에서 혀를 뽑아 먹는’ 잡식성이면서도 “미국산 소고기를 먹느니 청산가리를 먹겠다”며 일어난 길항작용이었는데, <진격의 거인>에 따르면 이러한 작용은 무지성(無知性) 거인들에게서 나타나는 식인의 집단성으로 분류할 수 있는 까닭이다.

따라서 ‘먹방’은 오락이라기보다는 본성이며, 바로 그 무지성 본성이 식인의 습성을 따라 “청산가리를 먹겠노라”는 집단성에서 거룩한 촛불을 드는 집단성으로 옮겨 다니도록 만드는 것이라 하겠다.

무지성 거인

3) 식인인가 섭식인가, ‘카니발리즘’

고기와 촛불. ‘고기’로 충혈된 분노가 거룩한 ‘촛불’의 분노로 이행하는 이 기현상의 표본을 우리가 그 식습성 외에 다른 모델에서 찾을 수 없는 이유는 근/현대기 모든 혁명의 모델로 추앙받는 18세기 프랑스 혁명 주제가 “빵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였던 점을 고려할 때, “고기가 아니면 청산가리를 달라!”는 주제는 참으로 독특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고기에 대한 그 같은 애착은 그렇기에 ‘무지성 거인’의 식습성 외에서는 유래를 찾을 수 없다 한 것이다.

<진격의 거인>은 이런 무지성 거인의 출몰로 시작을 고한 후, 지성을 지닌 아홉 거인의 단계별 출몰로 동심원을 그려나가며 전개된다. 그리고 그 동심원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과 거인의 관계는 세 단계 성벽이 밖에서 안으로 차례로 붕괴하면서 비밀 해제와 함께 또 한축의 동심원을 형성한다. 벽이 하나씩 붕괴되면서 거인들이 어디서 왔는지, 누구인지, 왜 식인을 하는지 봉인이 해제 되어가는 것이다.

아홉 종의 거인은 시조 거인, 초대형 거인, 갑옷 거인, 전퇴 거인, 짐승 거인, 여성형 거인, 진격의 거인, 차력 거인, 턱 거인, 각각의 능력과 특성에 따라 이름 지어졌으며 이들은 무지성 거인과 달리 지성을 지녔다. 목적을 구사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지성을 지녔다 하여 식인을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무지성 거인과 달리 먹는 목적이 있을 따름이다. 목적은 오로지 하나, ‘계승’이다. 각 거인의 능력을 타자에게 대물림하기 위해 먹히거나 먹는 것이다. 목적에 의거한 식인이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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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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