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구현사제단” 이란 이름은 사실 망령된 작명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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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구현사제단” 이란 이름은 사실 망령된 작명일 수 있다

프롤로그 | 야웨 치드케누

‘정의구현사제단’이란 이름은 사실 망령된 작명일 수 있다. 성경에서 정의는 신의 이름과 결합된 칭호이기 때문이다. ‘야웨 치드케누(Yahweh Tsidkenu)’ 즉, ‘야웨 우리의 공의(義)’라는 칭호가 그것이다(렘23:6).

“야웨 치드케누”라는 말은 예레미야가 미래의 왕으로 메시야를 예언할 때 언급된 이름이다. 한글에서는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고 읽혀 단지 평이한 문장으로 묻혀 읽히기 십상이지만 영어 역본에서는 언제나 대문자 LORD OUR RIGHTEOUSNESS로 표기되는 중요한 이름이다.

“야웨 치드케누”는 본래 다윗 왕가 최후의 왕이었던 시드기야를 거꾸로 써서 만든 말이다.

거기에는 다윗계열의 왕권 회복을 기원하며 현재 임금이 해내지 못한 공의를 실행할 왕의 도래에 대한 염원이 깃들어 있다. 현재의 왕은 불의한 왕(여호야김)이었거나, 두 눈이 뽑혀 남의 나라를 섬기는 신하가 되어버렸다(시드기야). 이 상황과 거꾸로 된 상황을 기원하는 언어유희이다. 현실의 파라독스인 셈이다. (시드기야의 수난 당하는 모습이 메시야의 수난과 유비된다는 견해들도 있다.)

이와 같이 공의를 메시야의 이름에 넣어 예언으로 선포하는 행위와, 그러지 않고 그것을 자기들 이름에 넣어쓰는 사제들이 저주문 낭독 따위를 예배로 둔갑시키는 행위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할 것이다.

그러나 그 공의가 실제로 어떻게 시연되는지는 같은 성서일과인 십자가 도상 두 강도의 대화 장면이(눅 23:33-43) 잘 보여주고 있다.

본론 | 공의가 집행되는 현장

다른 복음서와 달리 누가는 십자가에 매달린 이들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으로 펼쳐낸다. (다른 복음서에는 대화가 없다.)

(1)

첫 번째 남자가 말한다.

“네가 만약 그리스도이거든 너 자신과 우리를 구원해보라.”

저것이 과연 손과 발에 못이 박혀 죽는 마당에 나올 수 있는 소리인가 싶겠지만 우리 가운데는 분명 죽어가면서도 저렇게 말할 만한 사람들을 알고 있다. 악에 받힌 경우.

(2)

이어서 두 번째 사람이 앞선 남자를 꾸짖으며 말한다.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여기서 “동일한 정죄”라는 말은 무엇과 동일하다는 것인가? 어색한 문장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번역을 좀 더 다듬었을 때 그것은,

“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경우와) 동일한 판결을 받았다.”

라는 문장이 된다. 이것은 앞서 몸만 죽이는 권세가 아니라 영혼까지 죽일 수 있는 권세 가진 자를 두려워하라는 눅 12:4-5과 연결된 표현이다. 그는 이어서 계속 말한다.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두 번째 사람이 앞서 조롱한 사람을 꾸짖으며 예수께 구원을 청하는 장면은 누가복음에만 나온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두 강도 모두 그리스도를 욕하며 조롱한다. 즉 여기서는 세 명 간의 ‘대화’가 되는 바람에 재판/심판장의 형식을 띠게 된 것이다.

(3)

그러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옳지 않은 것이 없다”라는 말에 대한 판결이라기 보다는 그리스도를 제외한 자기 모두의 보응을 “동일한 판결”로 인식한데 대한 판결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기억하소서-”에 대한 판결문이다.

(4)

누가는 이것이 단순한 처형의 한 장면이 아니라, 공.중.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심판 도상임을 증언하였다.

이것이 다른 복음서에서 ‘강도’라고만 했던 이들을 ‘행악자’라고 부른 이유이다. 행악자는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이름이기 때문이다. “동일한 판결”을 받은 자들에 해당하는 보편적 호칭이다.

(5)

예레미야는 “야웨 우리의 공의(야웨 치드케누)”께서 정의와 공의를 행한다고 한 바 있다(렘 23:5). 정의는 무엇이고 공의는 무엇인가? 70인역 번역에서 정의는 크리마이고 공의는 디카이오수네이다. 크리마는 심판을 말하며 디카이오수네는 로마서식의 義가 될 것이다.

이 義와 심판이 어디에서 집행되는가가 가장 중요한 핵심인데 그곳은 바로 공중, 즉 십자가 위에서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 속에서 그 심판정이 매주일 열리는 것이다. 교회 바깥 저주문 낭독 현장이 아니라.

에필로그 | 공의(公義)에 관한 두 착각

두 가지 착각이 있다.
하나님 나라를 자기들이 가진 구원의 확신으로 가는 줄 착각하는 경우이다. 강도 한 명이 “나라가 임할 때 나를 기억하소서-”라는 말만 남기고 있는 걸로 봐서는 자신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줄 알았던 모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심판(크리마)이 마치 손오공이 타고 노는 구름 위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착각하는 경우이다. 심판이 벌어지는 공중은 바로 십자가 공중 위에서 벌어지는 이 ‘대화’에서다. 그것이 디카이오수네, ‘공의’이다.

[그리고 끝으로 그것은 다소 해묵은 주제, 목적격적 소유격이냐 주격적 소유격이냐는 문제를 안고 있는 ‘피스티스 크리스투’의 이해를 위한 플롯 버전 정도가 되기도 할 것이다.]

* 2013.11.24일자 | 공의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가? | 렘 23:1-6. 눅 23:33-43 (cf. 눅 1:68-79; 골 1:11-20.)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University Lecturer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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