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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클럽에서 예배를?

“어디든 우리가 예배드리는 곳이 교회다.” 도발적으로도 들릴 수 있는 이 같은 외침이 한국 교회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잡을 것인가. 27일 일요일 오후 서울 신사동 R호텔에 위치한 나이트클럽. 스피커를 통해 무대에 울려퍼지는 사운드는 신나는 댄스 음악이나 랩의 굉음이 아닌 찬양 소리와 ‘아멘’이다. 서울 강남권에서 ‘물’ 좋기로 유명한 이 나이트클럽에서 찬양 예배가 시작된 지 벌써 한 달째다. 예배 인원만 해도 매주 700명에 이른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힘든 ‘나이트 클럽 예배’를 기획한 주인공은 서울 온누리교회 청년부 ‘갈렙공동체’. 담당교역자인 김상수 목사는 “교회가 세상 속으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이라고 의미를 정리했다. 일반인들이 기존 교회에 대해 가지고 있는 엄숙하고 폐쇄적인 이미지를 벗고 적극적으로 세상에 접근하겠다는 얘기다. 갈렙공동체의 ‘세속’ 진출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젊은이들의 미팅장소인 스타벅스와 KFC에서의 새벽기도회로 확대됐다. 우리 사회 젊은 세대들에게 눈높이를 맞춰 적극적으로 다가선다는 전략의 하나다. 온누리교회는 이미 갈렙공동체 외에도 2~3개의 청년 조직이 홍대 앞 클럽과 대학로의 소극장 등을 예배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2006.8.10일자 동아일보>

이것은 당시 트렌드로 자리매김하던 이른바 <열린 예배> 형식에서 한 단계 더 진보한 형식의 예배로서 한 일간지에서 취재했던 기사의 일부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공동체에서는 성전건축을 아예 지양하고 체육관 같은 곳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하고, 그와는 반대로 성전건축 자체를 아예 체육관 형식으로 짓는 사례도 등장하였다. 이와 같이 예배와 성전의 관계를 탈착 가능한 공간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각종 프로그램도 교회(건물로서) 바깥과 호환성 높은 것들이 속속 등장하였다. 하지만 지금까지 나이트클럽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요”

은도 하나님 것이요 금도 하나님 것이라는 성전 건축을 북돋는 학개서의 이 말씀이 오늘 날도 예전 처럼 들려올까? 왜냐하면 요즘처럼 성전 건축이 사회문제가 되던 때는 없었기 때문이다.

70년 동안의 포로생활 후 이스라엘은 고레스 왕의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이들의 귀환은 3차에 걸쳐 진행되는데 스룹바벨 지휘 하에 약 5만 명 정도가 들어오는 1차 귀환 프로그램 때에 학개라는 인물도 함께 들어온다. 성전 재건을 위한 기초를 바로 이들이 준비하게 된다. 그러나 곧 사마리아가 주도하는 압력에 의한 난관에 부딪쳐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그 적대자들이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성전 재건을 지원하라는 명을 받게 되면서 공사는 속개될 수 있었지만, 유다인으로 명명되는 이들은 자신들의 집과 땅을 먼저 보수했다.

왜냐하면 어떤 나쁜 뜻에서 그런 게 아니라 포로기 오랜 기간의 방치로 땅도 황폐화 되었고 거주할 집도 없는 상태여서 자신들의 생활 거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생활 기반을 마련하였는데 그 기간이 무려 14-16년 정도나 흘러가버렸던 것이다. 이때에 바로 학개가 나선 것이다.

그는 스가랴와 함께 백성들에게 성전 중건을 선행할 것을 메시지로 선포한다. 은금이 내것이라는 말씀도 이 때에 들려준 예언이다. 학개의 사역은 매우 짧았다. 약 4개월에서 1년 정도로 학자들은 추정한다. 그렇지만 그의 메시지의 효력은 약 한 달 이내에 급속히 나타났다. 그 메시지의 3주 만에 백성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공사가 중단된 이래 B.C. 520년 경 다리오 왕 때에 건축이 재개되었는데, 마침내 B.C. 515년에 성전을 봉헌하게 된다. 이때 중건될 성전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1)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를 진동시키는 성전.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라고 한다면 한 마디로 우주(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공간 요소를 일컫는다 할 수 있다. 그 정도로 큰 공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전이바로 전체요 전부요 중심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그 전체를 뒤흔든다는 뜻이다.

(2) 모든 나라를 진동시키는 성전.

하늘과 땅과 바다와 육지라는 사물들을 영토적 의미로서 공간이라고 규정한다면 ‘나라’는 시간으로서 공간이라 규정할 수 있다. 그래야만 그 ‘모든 나라’에는 현재의 나라들뿐 아니라 그동안 열리고 닫혔던 모든 나라를 소급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야 말로 모든 시간을 뒤흔다는 말이다.

(3) 영광이 충만한 성전.

역사적 성전들은 여러 모양으로 여러 방식으로 모욕당하고 파괴당하고 방치당해 왔다.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게 채워졌던 적은 그리스도의 육체를 통해서 뿐이었다.

에필로그 | 우리의 성전

성서일과(lectionary) 평행 본문 중에 누가복음 20장27-38절은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인 이야기를 다룬다. 이것이 성전 중건을 촉구하는 학개서 본문과 평행하게 놓여 있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사두개인과의 부활 논쟁이 다름 아닌 성전에서 발생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성전의 자리에서 이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갖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저지하였지만(학개의 시대처럼) 특별히 여기서 사두개인으로 집약되는 자들은 부활에 대한 독특한 의구심으로 가로막는다. 일곱 남편 있는 여인이 죽으면 부활 후 누구의 아내가 되느냐는 것이다.

이 의구심은 어떤 고차원적인 사두개파의 신학을 배경으로 하는 질문 같지만 실은 그들의 영성이 생활 종교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여실히 드러내는 대목에 지나지 않는다. 즉 부활이라고 하는 영적 귀결을 생활 중심의 부활로 인식하는 우리네 자아상을 대변한다.

따라서 오늘 날 성전의 진정한 준공이 지체되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금융의 부재나 미결로 지체되는 것이 아니라 학개의 시대와 마찬가지로 텍스트 본질을 떠난 각종 생활 종교로서 행사의 분주함으로 그 준공이 지체되고 저지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이 “은도 내것이요 금도 내것이요”의 본 말이다.

예배 드리러 나이트클럽으로 모이라고 하던 때도 있었는데 그들은 다 어디 가 있는지 모르겠다.

* 2013.11.10일자 설교. | 제목: 조금 있으면 | 학 1:15b-2:9; 눅 20:27-38. (cf. 시 145:1-5, 17-21, or 98; 살후 2:1-5,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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