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익한 종 Vs. 사마리아 나병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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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익한 종 Vs. 사마리아 나병환자

우리나라의 나병(한센병)

나병은 구약성서에서 천형으로 묘사되거나 문둥이라는 표현으로 전라/경상도 욕설일 정도로 멸시의 대상이었다. 그런 멸시는 근대에도 계속돼 일제강점기 당시 소록도에 강제 수용해 그들의 인권을 짓밟았다. 당시 병원장은 환자들을 보살피는 선행을 베푼다고 언론에서는 미화되었지만 실제는 강제노역, 여성과 남성의 분리, 불임수술 등 악행을 저질렀다. 특히 일명 물방이라는 독방에 가두기도 했는데 방 구조가 문턱이 높고 고의로 물을 채워 넣은 구조로 이는 나병환자를 하루라도 빨리 죽이기 위한 고안이었다. 이 물방에 갇힌 나병환자는 겨울이 되면 물방의 얼음이 얼어붙는 바람에 얼어 죽기도 했다. 그 병원장은 살해당하였다.
광복이후에도 비토리섬이라는 곳에서는 토지소유문제로 분쟁이 발생 지역주민에게 학살당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로 그들은 비극의 역사를 걸어왔다. 이들의 처우가 개선된 것은 1965년 당시 소록도국립병원장이 소록도에 거주하는 환자들을 배려, 과수업, 양돈업 등으로 자립을 할 수 있게 하면서부터였다. 축구팀도 만들어 그들이 몸만 불편할 뿐, 정상인보다 못한 게 없음을 보여주었다.
나병은 2000년 경 법률적으로 한센병이라는 명칭으로 공식화된다. 나병과 한센병은 의학적 의미에서는 같으나 사회적 의미에서 다르다. 나병은 치료약이 없어 환자의 형상이 말기까지 진행되던 때의 명칭이라면 한센병은 치료가 되는 병으로서 의미가 있다. 리팜피신 600㎎ 1회 복용이면 3일 이내에 전염성은 없어진다는 사실이 오늘날 한센병 치료의 개가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이러한 강력한 항나제를 1980년대 초반부터 환자 전원에게 투여해 오고 있다. (원글: 위키피디아, 한국한센복지협회)

복음의 가치는 순종인가 자유인가

본문: 눅 17:11-19. (c.f. 렘 29:1, 4-7; 시 66:1-12; 딤후 2:8-15.)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이전 구절(1-10절)의 내용을 통해 구조를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 실족: 연자 맷돌/Me ————-> 바다에 빠지는 것이 낫다.(1-4절)
– 믿음: 뽕나무/Gentile ————> 바다에 심기우리라. (5-6절)
– 순종: 일하고 돌아온/종 ———-> 식사 수발/무익한 종. (7-10절)

여기에다가 금주의 본문 11-19절을 같이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 감사: 나병환자/Gentile ———-> 돌아온 Gentile/사마리아인. (11-19절)

연자 맷돌을 목에 달고 바다에 빠지는 자는 “나” 입니다.
믿음으로 바다에 심기는 뽕나무는 “이방인” 입니다.
그렇다면,
일하고 돌아와 피곤함을 무릅쓰고 식사 수발을 드는 “무익한 종” 역시 “나” 입니다.
왜냐하면, 감사함으로 돌아온 사마리아인 나병환자와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의 자세한 내용은 https://www.facebook.com/pentalogia/posts/652781511420938)

이와 같이 “나/무익한 종”과 “사마리아인/돌아온 이방인”의 대조됨으로써 실족케 하는 무익한 종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감사하는 사마리아인처럼 될 것인가를 핵심 문제로 던기고 있는 것입니다. 특히 금주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나병환자, 그 돌아온 나병환자의 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음이 중요합니다.

(1) 멀리 서서(afar off)

그들은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말했습니다. 나병환자이기 때문에 가까이 올 수 없어서 입니다. 그 대신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자비) 여기소서.” 라고 소리를 높여 구한 것입니다.

(2) 보시고(saw), 보이라(show).

먼저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셨습니다(saw). 그러시더니 제사장에게 하거 ‘너희 몸을’ 보이라(show)고 하셨습니다. 전혀 보여 주지 않으며 신앙 생활하는 사람이 귀담아 들을 대목입니다.
(3) 가다가(set off)

그랬더니 그들이 가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제사장들에게 닿아서 고침을 받은 게 아니라 가다가 고침을 받은 것입니다. 여기서 유념할 것은 출발 지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어느 지점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set off, 즉 출발하자마자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으로 보는 것이 더 원문에 가깝습니다. 출발하자마자 나은 것입니다.

(4) 돌아와(turned back)

그럼에도 10명 중 1명이 돌아오게 됩니다. 도착지에 거의 도착해서(돌아오기에는 먼 거리라서) 뿔뿔이 헤어졌다면 이해가 갈런지 모르나 출발하자마자 병이 나았는데도 1명만 돌아오고 만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그 본심의 차이가 확실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종의 근성인지 감사의 근성인지.
돌아온 그는 그냥 돌아온 게 아니라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 이 네 단계 과정에서 생각되는 자신의 적용을 이야기 나눠 봅시다.

에필로그 | 오는 것(to come)과 돌아오는 것(turn back).

지난주에 연하여 이번 본문 역시 자유에 관한 본문 입니다. 오늘날 종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Freedom과 Liberty, 즉 똑같은 자유이지만 여기서 형성되는 간극을 통해 우리는 여전히 억압하고 – 기꺼이 억압 받고 – 방종을 합니다.
(이 Freedom과 Liberty에 관해서는 다음 아티클을 참조하세요: https://www.facebook.com/MiMoonChurch/notes)

지금까지 이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동사입니다.
“나”(연자 맷돌)는 바다에 “빠졌다”면 “뽕나무”(이방인)은 바다에 “심기어”집니다.
“나”(무익한 종)은 일하고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마리아인 거기다가 나병까지 걸린 이 사람은 “돌아와” 있습니다.

무익한 종에게 사용한 동사는 에이세르코마이, 나병환자 사마리아인에게 사용한 동사는 휘포스트레포로서, 후자는 “돌아와” 있는 것에 반해 전자는 아무 힘 안들이고 “들어와”(to come/to enter) 있는 것입니다. 무익한 종은 그냥 언제나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런 감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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