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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떼

신약성서에도 정치적 당파는 등장한다. 우리가 잘 아는 사두카이오스, 파리사이오스, 헤로디아노이, 그리고 끝으로 이스카리오테스 즉 <열심당>으로 알려진 시카리만이 기록에 남아 존재한다. 각 당파는 기본적으로 종교노선을 갖지만 헤게모니 층이 귀족인가 사제인지 교사인지 일반 행동파 시민인지에 따라 나뉘는 경향 또한 보인다.

요세푸스는 이들 모두에게 도래되는 종말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많은 백성들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곡식 한 그릇에 팔았다. 부유한 계층은 밀 한 그릇에 재산을 팔았으며 가난한 계층은 보리 한 그릇에 소유를 처분하였다. 그들은 이같이 재산을 팔아 곡식 한 그릇을 산 후 문을 닫고 집 안의 가장 후미진 방에 숨어 그 곡식을 먹었다. 어떤 이들은 너무나 오래 굶주린 나머지 곡식을 맷돌로 타지도 않고 그냥 먹은 반면에 어떤 이들은 빵을 만들어 구워 먹었다. 그들은 각자 두려워하는 정도와 배고픈 정도에 따라 곡식을 그냥 먹기도 하였고 빵을 만들어 구워 먹기도 한 것이었다. 어느 집에서도 식탁을 따로 차리고 식사를 하는 집이 없었다. 빵이 다 익기도 전에 화로에서 허겁지겁 반쯤 익은 빵을 꺼내 눈 깜짝할 사이에 먹어 치웠기 때문이었다.
… 백성들이 이같이 음식을 대하는 모습은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유력 인사들은 먹을 것이 넉넉했으나 가난한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눈물을 흘렸다. 기아와 굶주림 앞에 인간의 모든 감정이 제대로 발휘될 리 없었지만 무엇보다도 겸양은 찾아보려야 찾을 길이 없었다. 다른 때에는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도 이제는 경멸의 대상이 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부모의 입에 들어갈 한 조각의 빵까지도 부모의 입에서 빼앗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눈 뜨고 볼 수 없는 일은 어머니들이 어린 아이의 음식을 빼앗아 먹는 광경이었다. 가장 사랑스런 자식이 자기 손 안에서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꺼져가는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마지막 한 입의 빵까지도 빼앗아 먹으면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 강도들은 음식을 빼앗는 데는 남녀노소의 구별이 없었다. 그들은 아이들이 음식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대롱대롱 매달리면 번쩍 들어서 빙글빙글 돌이다가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또한 강도들은 집안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하는 자나 음식을 빼앗기는 것이 아까워 음식을 삼킨 자는 가장 잔인하게 대했다. 강도들은 음식이 어디에 감추어져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잔인한 고문 방법가지 창안해 냈다. 즉 은밀한 부분을(음부) 꽁꽁 묶고 항문을 날카로운 막대기로 마구 쑤셔대는 고문법을 고안해 낸 것이었다. 강도들은 겨우 빵 한 조각이나 보리 한 줌이 어디 숨겨져 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듣기만 해도 소름끼치는 악랄한 고문을 백성들에게 자행하였다. 강도들은 아직 배고프지 않으니까 이토록 백성들에게 만행을 저지른 것이었다. 그들이 진정 배가 고파 그런 일을 저질렀다면 그토록 잔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강도들은 단지 앞날을 위한 식량 비축과 그들의 광기를 훈련하기 위한 목적에서 이 같은 일을 저지른 것이었다…”

-유대전쟁사

<유대전쟁사> 중에 이런 기록을 남기고 있는 요세푸스라는 인물은 친로마 인사로 보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정치라는 리워야단을 <강도떼>로 적는 대목만큼은 우리 모두 의심의 여지없이 읽을 수 있다. 가난한 자의 이름을 도용하는 그들은 언제나 훈련을 목적으로 그 가난한 자들의 식량을 탈취해간 것이 역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최근 우리 주변에 등장하는 기독교식 정당이니 고지론이니 저지론이니 시민연대니 하는 특정된 색채로 그리스도를 데려가는 행위는 넌센스다. 적어도 그리스도를 그렇게 소개하지 말 것을 충고한다. 그리스도는 세력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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