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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1-29 10:04 오전 #10167
본문:
이사야 64:1~9
시편 80:1~7, 17~19
고린도전서 1:3~9
마가복음 13:24~37각 주제:
사 64:1-9 | “Since ancient times no one has heard, no ear has perceived, no eye has seen any God besides you, who acts on behalf of those who wait for him.”
시 80:1-7 | “you who lead Joseph like a flock; you who sit enthroned between the cherubim, shine forth”
고전 1:3-9 | “He will keep you strong to the end”
막 13:24-37 | “Be on guard! Be alert! You do not know when that time will come.”메시지 테마:
죄악을 영영히 기억하지 마옵소서
신학적 주제:
믿음은 어떻게 전수되었는가
파라볼레:
성서에서 말하는 예언자는 우리 시대의 목사가 아니라 언론(인) 또는 오피니언들.
해설:
신실성과 믿음의 기원.
오늘날의 기독교와 유대교 경전의 배경이 되고 있는 고대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외세에 시달리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지금도 그렇다).
두 나라는 미국이라는 국가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자주다운 자주를 구가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다.
이스라엘은 우리나라가 병자호란 또는 그 이전부터 줄곧 중공의 영향을 받아온 것처럼 메소포타미아 제국을 점령하는 군주들에게 시달리는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그들에게 종교는 내세의 구원이라기보다는 가혹한 현실을 살아내는 생존의 동력이었다. 죽음 외에는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그들의 신앙은 크게 두 가지 이념 노선을 그리며 전개되었다. 하나는 규범(민법과 형법이 융합된 종교적 규범을 말한다)을 잘 준수하면 영원무궁한 지복이 보장된다는 이념이고, 다른 하나는 신이 한번 선택한 이상 영원무궁토록 버림 받지 않는다는 이념이다.
전자의 이념은 당시의 지리적 영토를 획득한 조상들의 신앙으로 받들어졌고, 후자의 이념은 왕정이 출발하면서 국가신학으로 정착된 일종의 통치 이념이다.
예컨대 기다란 지팡이에 뱀이 내 걸린 도상은 전자의 주된 상징이자 기호로서 산등성이에 주로 가설되어 그런 고지는 명목상 시내산으로 자처되었다. 이에 반해 후자의 국가신학은 왕족이나 귀족이 드나들고 관장하는 궁전 자체가 그 영원한 기호가 되었다.
땅을 찾아 떠도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독에 중독되었을 때 난데없이 해독제로 등장하는 장대 위의 구리 뱀은 일종의 천사의 모형이다. 공중을 나는 뱀의 도상에서 유추하였을 것으로 보이는 이 기호가 얼마나 오랜 기간을 모세-율법을 표지하는 기호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는 왕정이 개시된 후 무려 13대까지 보전되어 온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기호를 미신으로 규정해 제거한 인물은 바로 히스기야라는 군주였다.
이런 미신을 타파한 히스기야의 배후에는 국가신학의 일등 공신인 이사야 선지자가 있었다. 창세기 초입에 배치된 악의 기원을 나무에 드리운 뱀의 도상으로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왕조신학의 손길이 미쳐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을 뱀의 도상으로 미신화한 것처럼 미신은 왕조신학에도 곧 작용되었다.
병자호란부터 중공이 아가리 벌리고 곁을 지켜오고 있는데도 미세 먼지 호흡 공동체임을 역설하는 종자들은 어느 시대 어느 나라에나 있기 마련이다. 왕조신학을 전거로 발전한 미신은 대가리가 깨져도 나라를 빼앗기지 않는다는 절대적 맹신이었다.
결국 남한산성에서 인조 머리가 깨진 것처럼 이스라엘도 머리가 깨질 뿐 아니라 눈이 뽑혀서 적성국 포로로 끌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사실은 이 시점부터가 유대교/기독교 경전의 시작이다.
국가 영토가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 타지/타국에 동화되지 않고 재건의 꿈을 키울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은 것은 바로 히스기야의 왕권 신학을 설계한 이사야 자신과 그의 후계자들이었다. 이것이 이사야 예언의 본질이다.
이사야의 이름으로 진행된 이 희망의 지적 설계에는 ‘야웨의 종’이라는 독특한 개념으로 전개되었다.
전쟁의 신 야웨의 종이 수난 받는다는 교리이다.
그것은 위대한 전쟁의 신이 진 것이 아니라 징계의 기간에만 한정된 수난이었다. 이 예언은 무당의 굿을 타고 흘러나온 예지몽이 아니라 고도의 지적 설계였는데, 미리 선언된 이 예언 프로그램 덕택으로 끌려간 자들은 자살하거나 동화되지 않고 무려 70년을 버틸 수 있었다.
한정된 기간이 만료되자 공교롭게도 페르시아의 군주 키루스가 혜성처럼 나타나 끌려갔던 유대인 중에 원하는 자들은 누구든 고향으로 올 수 있도록 조처되었다.
이 기간 중에 형성된 최고의 가치가 바로 ‘신실성’이다. 흔히 우리가 오늘날 ‘믿음’이라 부르는 바로 그것이다.
이 ‘신실성’의 작품을 도출해낸 예언 프로젝트의 총아는 ‘(고난 받는) 야웨의 종’이라는 개념이었는데, 이것이 실제로 정확히 무엇을 일컫는 개념인지는 여전히 가려져 있다.
‘야웨의 종’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동안 대략 세 종류의 집단을 만들어냈다.
첫째, 1세기 기독교 경전의 저자 중 복음서 초안을 맡았던 마가(Mark)는 이 수난 받는 야웨의 종의 모습을 그리스도의 생애가 투영되도록 묘사했다. 둘째, 이 1세기 기독교의 후예 중에서 18-19세기 마르크시즘에 세례를 받은 기독교도는 이 수난당하는 야웨의 종을 사회의 빈민층으로 투영시켜 자기들은 빈민층의 상부구조를 차지하고 모든 계층을 하부로 끌어내리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해방신학, 민중신학…이런 것들이 그 사상의 패션이다. 끝으로 셋째, 바벨론 포로기 징계 기간을 마치고 돌아온 당대 유대교(인) 자신이다. ‘유대’라는 명칭이 의미하듯(이 명칭은 한 부족의 이름이다) 강력한 혈족 중심의 배타적 코드로 재건되었지만, 훗날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종이 유다 인종을 자처하며 가입자 중심의 명목상 시오니즘을 낳았다. 상기의 기독교도 중에는 이 시오니즘으로의 회귀를 세상 끝으로 보는 종말론에 귀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야웨의 종’에서 산출한 신실성의 본질은 이것이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ㅡ고 하였을 때 여기서 ‘믿음’의 정체는“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구심력을 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에크 피스테오스 에이스 피스틴
ἐκ πίστεως εἰς πίστιν즉 정확히는
“믿음에 믿음안에 이르는” 구심력이다1) 에크 전치사가 속격과 함께 쓰일 때는 명백하게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
2) 에이스 전치사가 대격과 함께 쓰일 때는 명백하게 밖으로 나가는 것이다.믿음에서 나와 믿음 안으로 들어가는 구심력인 셈이다.
그래서 이 믿음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믿음”(π́ιστις Χριστου̑)이라 부른다.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이 숨 쉬는 줄 착각한다.
숨이 우리를 쉬는 것인데도.
숨이 멎으면 우리는 종료되는 것이다.믿음도 그러하다.
우리가 믿는 줄로 착시를 일으킨다.
그리스도의 믿음인데도.수난 받는 야웨의 종이란,
사람의 고난 속에서 그리스도의 믿음이 호흡하는 원리를 말한다.이 호흡이 바벨론에서 깊이 잠든 고대 이스라엘을 흔들어 깨웠을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는 이야기의 본말이다. 이사야 가라사대, “우리는 진흙이요(אנחנו החמ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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