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해제 #14. 판단력 비판
아래 ‘이공계 대(對) 인문계’ 비유가 이공계에게는 미안한 표제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특별히 오늘날의 ‘이공계’를 특정했다기보다는
여전히 데카르트,
즉, 인간을 ‘사유’와 ’연장’으로만 관조하는 방향성의 세계관을 지목한 것이라 보면 별 무리가 없겠습니다.
이성의 범주란 그런 것만이 아닌데도
회의주의를 향해 날라가던 이성은
자신의 속성이 마치 그런 것처럼 회의적인 사고에 주력했습니다.
진화론은 칸트, 다음 다음에 가서야 다루겠지만,
이미 회의주의 속에서 ‘믿는 것’은 ‘아는 것’에 의해 질식 당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는 것’이 볼 때, ‘믿는 것’은 현상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는 것’이 현상에 기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바로 <진화>인 것입니다.
여기에 제동을 건 사람이 칸트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인간에겐 ‘사유’(의심하는 나)와 ’연장’(빈 봉지로서 나) 외에도
타고난 그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규명하는데 천착했습니다.
이를 위해 ‘이성’이라는 말에 필적할 만한 오성(悟性)이라는 말을 들여왔습니다.
오성을 보통 Understanding(Verstand)이라고 부르는데
이를 입증해내려고 도입한 틀이 바로
미(美)에 대한 우리의 인식 틀입니다.
여기서 칸트가 말하는 美는 포르노에 등장하는 여성/남성의 美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폭포수나
어마어마한 아름드리 나무 앞에 서면
우리의 입이 떡ㅡ 벌어지는 그 감각(‘감관’이 정확한 표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상태는 (마치 ‘두려움’인 것만 같기에)
‘경외감/ 숭고’라고도 표현합니다.
이 감각의 경로는 동물에게는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 칸트는,
이 감각 경로가 궁극적으로 인간의 ‘도덕’(성)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입증시켜나갔습니다.
칸트는 서양 철학 중에서도 대단히 난해하고 어려운 분야에 속합니다.
읽기도 어렵죠.
그러나 데카르트로 집약되는 (기계적) ‘이성’이 도발한 회의주의가 침공해 들어왔을 무렵
이 알아듣기 어려운 칸트의 미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심어 놓으신 ‘덕성’에 관한 증언을 피력함으로써, <진화>를 향해 치닫는 ‘새 물결’을 저지하는데 종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가 말했던 저 유명한 말!
Fiat justitia ruat caelum!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우라!”
ㅡ는 이 말은
칸트 철학의 궁극적 테제였던 ‘정언명령’의 총아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가 입증하려고 했던 ‘도덕’(성)을 신학에 100퍼센트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만
그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기독교는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으로서 인간의 도덕적 의무에 대한 인식이다”(I. K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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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비율 1:1.618.
이것이 우리가 보기에 쾌적한 美가 되는 이유는
공학적인 도출일까요?
아니면 이미 자연 가운데 심기운 절대 기준에
학습 당한 결과일까요?
여기에 쉐카이나에 대한 ‘믿음’이 결부되어 있는 것입니다.
* 예술은 창조해내는 것이 아니라 이 책 서문에서 밝혔듯이, 있는 것에서 ‘찢고,’ ‘오리고’, ‘갖다 붙이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물을 뚫고 보는 눈이 중요한 것이죠. 쉐카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