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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lectionary)는 3년을 주기로 회전한다. 3년 주기로 같은 성경 본문을 마주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 글은 그처럼 반복되는 본문으로 설교를 구성하는 방법적 예시이다. 동시에 체험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절대적인 방법은 아니며 내가 선호하는 방법의 전부도 아니다. 그 주차에 해당하는 성서일과와 그해에 직면한 맥락이 일치하란 법도 없을 뿐더러 시대와 사회상은 그때그때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성서일과가 있다고 가정하자.

예문: ‘누가의 부활제 이해’

사도행전 3:12~19; 시편 4; 요한1서 3:1~7; 누가복음 24:36b~48.
[부활절 3주차 본문]

Caravaggio, Emmaus, 1606, Milan.

앞서 언급한 것처럼 내가 이 본문을 받아들었을 때는 지나간 3년간 성서일과 A, B, C, 순환 주기를 모두 완료한 상태였을 것이다. 저 성서일과 본문은 최소 두 번째 혹은 그 이상의 순환을 마친 상태인 셈이다.

3년 전 당시 나는 이 본문을 ‘의(義)의 제사’(시편 4편)란 주제 속에서 다루었다. 그 주제를 중심으로 당시 ‘지계표’라는 핵심어를 떠올렸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다음은 ‘지계표’라는 핵심어를 중심으로 묵상한 내용이다.

의의 제사란 무엇인가

The 12th boundary stone from Tel Gezer, discovered over a decade before this latest find. The bilingual boundary stone features Greek and Hebrew text with personal and geographical titles. Photo: Bibleplaces.com, Judah and the Dead Sea Collection http://www.biblicalarchaeology.org/
The 12th boundary stone from Tel Gezer, discovered over a decade before this latest find.

1. 지계표. ‘지계석’(an ancient boundary stone)이라고도 부르는 이 경계의 표식은 이웃과 내 땅을 구분하는 돌을 말한다. 그런데 고대에는 자기 구역을 넓히려는 욕심으로 슬쩍 이 돌을 이웃 쪽으로 밀어놓는 일이 빈번했던 모양이다. 성서는 그렇게 이웃의 지계표를 옮기는 자를 저주하였다(신 27:17). 합의해서 세운 지계표를 옮겨놓으면 도무지 그 기준 지점을 알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오늘날은 지적과가 있지만). 그런 점에서 사람의 양심에 의존해야 했던 이 고대의 지계표는 경계선이 점점 모호해져 가는 이 시대의 법 속성을 잘 표지한다. 오늘날의 법은 어떤 절대적인 경계라기보다는 사회적 합의로 인식들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2. 義! 하면, 반드시 옳고 바른 것을 뜻한다. 세상에서는 법(法)이 그 개념을 수행하지만 실제로는 그 법의 기준과 경계가 자꾸만 움직여 왔다. 가령 우리나라의 근대화 시기에는 여성이 미니스커트를 입고 거리를 활보하면 경찰이 무릎 위로 치마 길이를 재서 기준을 넘을시 처벌 하였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 법이 웃음거리가 되었으며 오히려 공중파 방송의 선정성은 도를 넘은지 오래이다. 더 나아가 그러한 개개인의 자유가 도리어 그 과거의 규정을 독재의 산물로 규정하고 단죄를 실행한 바도 있다. 그리고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간 지금은 집단화된 개인의 자유가 그 개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경계선까지 바짝 다가서 있다. 그래서인지 法! 이라고 통칭은 되지만 사실상 사회적 ‘합의’로 격하된 이 법 인식 속에서 우리가 악인이라는 사실은 엄밀한 의미에서 그 (오락가락하는) 경계선의 상대적 개념으로만 인식되고 있는 실정이다.

3. 상대적 개념으로서 ‘악(인)’이란 무슨 말인가? 현대인에게는 누구나 관계와 입장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현대인인 우리는 그 관계를 중심으로 반드시 누군가에게는 선인이며 누군가에게는 악인이라는 사실까지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계와 입장에 따른 오해라고 여기지 자신을 어떤 명시적 악으로 규정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대인의 지계석은 땅 아닌 마음에 놓여 있고 그것은 언제나 저만큼 이웃 쪽으로 물러나 있는 것이다. 현대인의 예배가 그러하다.

4. 어떻게 하면 이 지계석을 경계석 되게 할 수 있을까? 이 지계석의 문제는 의(義)로 드리는 제사의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5. 여기에 그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은 오로지 하나, 딛고 선 땅을 바꾸어 서 보는 길이다. 그렇게 했을 때에 비로소 그 자신이 망각했던 이웃의 지계표 위치는 새롭게 파악된다. 이것을 우리가 뉘우침, 또는 회개라고 부른다. 그 옮겨진 지계석의 위치는 이웃에게로 물러나 있는 만큼, 결국에는 나에게로 밀고 들어온 지계석임을 발견함으로써(왜, 입장이 바뀌어 봤으니까) 의의 제사는 활력을 띠는 것이다.

6. 이때에 그 지계석은 본래에 위치해 있던 경계선상에서 멀리 떨어져 위치해 있음에도 뉘우침(깨우침)의 복원력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에 유념할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원래 서 있던 그 돌의 위치보다도 더욱 의가 집결 되는 정위 지점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 지계석의 이동 만큼 회개할 수 있으니까. 따라서 이 지계석은 땅에 세우는 돌이 아니라 마음에 세운 돌, 예수 그리스도인 셈이다.

7. 여기까지가 ‘의의 제사’의 준비태세이며, 그런 점에서 이 제사의 특징은 어떤 ‘악한 제사’에 대조된 제사라기보다는, 복이나 비는 제사(기복)에 대조된 제사라 할 수 있다.

2012년 부활 후 2주차 설교 요지
h4>‘의의 제사’는 내 삶에 어떻게 성취되었는가?

3년 전 당시의 저 ‘의의 제사’에서 3년이 경과한 지금 이 본문을 다시 들고 선 나는 과거의 내 설교와 마주한다. 곤혹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쨌든 3년 전 당시에 발행한 설교의 결과가 무엇인지 현 시점에서 직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바로 이 성서일과의 위력이다. 다시 돌아온 이 본문과 과거에 발행한 설교가 나 자신에게 먼저 묻기를 실행하는 해석학인 것이다.

설교자가 양심에 화인을 맞지 않은 이상은 모든 주제가 설교자인 나 자신에게로 역류하기 마련이다. 이 성서일과의 순환은 보다 구체적으로 설교자인 나의 양심을 먼저 후벼 파고 들어 온다. 이것이 성서일과로 설교하는 곤혹스러움이라고 한 것이다.

소재의 순환은 ‘주제 설교’라고 다를 바 없다. 본문의 순환 문제는 모든 방식의 설교가 공유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주제 설교를 몇 년씩 지속하다 소재가 고갈되면 과거에 했던 설교 중 적당한 것을 고른 후 뒤로 뒤집거나 옆으로 접거나…그런 방식으로 새로움을 가공하기 마련이다. 그렇게 ‘창작된’ 새로운 설교에 앞에서는 설교자 자신을 확증할 길이 없다. 이미 가공 단계에서 불리한 것들을 회피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서일과는 훨씬 윤리적이다.

당시 나의 경우에는 다행히 결실이 있었다. 어떤 결실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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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서일과─반복되는 본문으로 설교하는 법”의 1개의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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