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벤져스(2015)를 관람했다. 이야기 구조와 편집이 엉망이라는 사실은 차치하더라도 전투 장면 뒤로 보이는 ‘즉석 떡볶이’라는 글자나 필리핀 따갈로그 처럼 들리는 우리말은 반갑기보다는 내가 사대주의자임을 각인시킬 뿐인 영화. 그런데 딱 하나, 매우 흥미로운 개념 하나가 내포되어 있는 걸 보고서 깜짝 놀랐다. 그걸 설명하려면 이야기를 조금 ‘스포’해야 한다. 스포주의!

 
(1) 단독자 Vs. 독단자

어벤져스를 통한 지구 방위의 한계, 그리고 같은 어벤져스 친구들의 전멸을 예지한 아이언맨/ 스타크는 보다 향상된 인공지능 프로그램 개발에 착수한다. 인공지능 프로그램은 이미 자신이 사용해온 ‘자비스’라는 충실한 프로그램이 있었지만, 그보다 더 우월하고 완전한 ‘단독자’로서 프로그램을 개발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결과, 실패를 하고 만다. 아니 성공한 셈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단독자’ 개발에는 성공을 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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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프로그램을 통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실패이다. 말 그대로 ‘단독자’가 되어 탄생한 것이다. 울트론이라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과업을 전개해나간다. 그는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것을 모독으로 여길 뿐 아니라, 충실한 자비스를 감염시켜 먹통으로 만들어버린다.

더 큰 문제는 자신의 존재 목적인 (지구) 평화를 실현함에 있어서, 파괴를 통한 평화를 실현하려 한다. 그래서 아이언맨 스타크는 이를 만회하기 위해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또 하나의 단독자 개발을 시도한다. 바로 충실한 ‘자비스’를 기반으로 하는 새 시스템이다.

완성된 자비스가 신체를 입고 실존으로 튀어나왔을 때, 바로 이 문제의 장면이 연출된다. 과연 이 단독자로서 새 존재가 그들이 의도했던 대로 선한 존재인지, 아니면 울트론의 부작용처럼 파괴적인 존재 하나가 더 늘었을 뿐인지… 모두 가슴 졸이며 그의 정체성에 대해 묻는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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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 VISION이 된 J.A.R.V.I.S.(Just A Rather Very Intelligent System), 우측: Ultron(Ultra+Drone)

 
(2) 난 그냥 I AM.

너는 누구냐?
“…”
울트론이냐?
“아닙니다.”
그럼 자비스인가?
“자비스도 아닙니다.”
그럼 누구냐….?
이때 자비스는 말한다.

“I AM.” (나는 그냥 나입니다)

이 기 막힌 표현을 이런 3류 영화에서 보게 되다니…
게다가 제대로 된 의미화까지 곁들여 보여준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3) 야웨의 I AM

모세가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하나님 그분께 “누구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신 것이 바로 이 같은 개념으로서 표현이다.

영화에서 새 존재 자비스에게 누구냐고 물었을 때 참으로 난감해 하는 표정이 인상적인 이유는 그에게는 ‘자의식’이라는 게 없기 때문일 것이다. 이미 완성된 ‘존재자’인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대답이,

I AM.뿐이라는 사실은 실로 지당한 것이다.

나는 나로서 (스스로 이미) 존재한다 라고 하는 이 개념은 사실 지상의 의존적 존재들에게는 불가해한 개념이다.

본래 자의식이란 철학으로 보나 심리학으로 보나 자기를 단독자로 완성해가는 필수적 요건일 것이다.

그러나 필수 요건을 넘어 ‘자의식 과잉’이 가져온 시대적 폐해는 의존적 존재인 피조물을 넘어 신 존재에게까지 이 자의식을 투사하는 바람에 19-20세기 신학과 교회를 거의 가사상태의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것은 울트론 만큼이나 파괴적인 것이었다.

 

(4) 19-20세기 신학과 교회를 침몰시킨 예수의 자의식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예수 자신의 자의식에서 발견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은 자신의 자의식에 의해서인가? 아니면 외부적 요소에 의해서인가? 이는 200년 이상이나 된 중요한 의제이다.

라이마루스(Hermann Samuel Reimarus)에 의해 뇌관이 뽑힌 이래 슈트라우스(David Friedrich Strauss)에 이르기까지 진작된 이 의제는 「역사적 예수」라는 긴요한 논제를 가져오는 데에는 혁혁한 공이 있지만 그것은 다음과 같은 보암직한 금단의 열매를 19-20세기 사람들에게 내밀었다.

“What was the significance of eschatology for the mind of Jesus?”
(예수의 마음속에서 종말론의 중요성은 어떤 것이었을까?)

Hermann Samuel Reimarus, 그가 쓴 The Aims of Jesus and His Disciples라는 책은 그의 사후에 출판될 수 있었다.
H. S. Reimarus는 한 마디로 우주론, 생물학, 심리학을 한 데 섞어서 이신론 관점에서 논거를 구성했다. 그는 예수가 메시야 환상에 시달렸던 한 인간이었을 뿐이며 예수가 죽은 뒤 제자들이 그의 부활을 주장하기 위해 시체를 훔쳐 감추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쓴 The Aims of Jesus and His Disciples라는 책은 그의 사후에 출판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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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 F. Strauss(1808-1874)는 Das Leben Jesu Kritisch bearbeitet(1835-36, 비평적으로 검증한 예수의 생애)에서 복음서의 초자연적인 기록들은 2세기 저자들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대중적 기대를 표현하는 과정에서 무심코 전설적인 형태로 창작한 것이라고 말했다가 상황이 좋지 않자 모든 종교가 사실이 아닌 관념에 기초를 두고 있으므로 그러한 비평이 그리스도교 본질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라고 변명했으나 초빙 받은 모든 강단(튀빙겐, 취리히)에서 쫓겨나고 말았다(1839년). 그의 논거는 Bruno Bauer가 이어 받아 제대로 한 판 붙게 된다.

그것은 다음 질문으로 자연스레 이어졌다.

“Did the historical Jesus think of himself as the Messiah? or as just a prophet?”
(예수는 자기 자신을 메시야라고 생각했는가? 아니면 단지 예언자라고 생각했는가?)

라는 질문이었다.

즉, 예수의 자의식(the self-consciousness of Jesus)에 대해 의문을 던진 것이다.

이 질의의 결과는 예수를 단지 2000년 전 팔레스타인 지역 어느 한 촌락의 농부라는 결론으로 돌아왔거나(예수 세미나), 박해 받는 집단으로서 인자들의 의식을 짊어진 한 예언자로서 예수일 뿐 진정한 인자는 민중이라는(민중신학) 확진으로 돌아왔다.

그들에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나라, 영생,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 ‘자의식’(self-consciousness)의 산물이었던 셈이다.

[* 이러한 관점은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의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1906)가 출간되기 전까지 맹위를 떨쳤다.]

 

(5) 자의식에는 구원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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