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친구분들이 감동을 많이 받은 영화인데, 위플래쉬에 대해 좀 미안한 비평을 해야겠다.
거기서 나오는 주인공 선생님이 가장 혐오스러워 하는 말,
“Good Job!”(참 잘했어요)라고만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lol~
위플래쉬(whiplash)는 채찍질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편없는 작품이지만 가능성 있는 부분을 캐내어 발견해주고 그곳을 집중적으로 칭찬해주는 방법 하나,
그리고 다른 하나는 탁월한 작품이지만 그 부분을 못 본척하고 잘 안 되는 부분만 집중적으로 들춰내 채찍질 하는 방법이다.
위플래쉬의 선생이 바로 후자이다.
그는 밴드 지휘에 목적이 있던 게 아니라, 제자로 하여금 “극한의 경지를 넘게 해주려 했다”고 회고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경우 대개는 제자의 꿈을 키워준다기보다는 제자로 하여금 선생인 자신의 꿈을 꾸게 만드는 사례가 태반이다.
제자 하나가 그 극한 트레이닝을 극복하고 일류 수석 연주자가 되었지만 자살하는 일이 영화에서 발생한다.
왜? 꿈은 이뤘는데 자기 꿈이 아니기 때문.
자고로 선생은 제자로 하여금 제자 자신의 꿈을 꾸게 만들어줘야지 선생인 자기 꿈을 강제해놓고선 꿈 꾸게 만들었노라ㅡ고 말하는 것처럼 사디스트도 없는 것이다.
대개의 사디스트는 남의 꿈을 자기 꿈의 질료로 삼는다.
예술뿐 아니라 교회도 마찬가지.
재즈가 그처럼 가학적인 음악인지는 이 영화를 보고서야 알았다.
재즈는 ‘자유’가 아니었던가?
극한의 훈련을 통해서 ‘자유’를 표현한다?
‘자유’를 어떻게 노예 훈련을 통해서 표현하나?
제자에게 앙갚음 하는 백인 재즈 선생을 등장시켜
재즈는 ‘노예 훈련’이라고 가르치다니…
골때리는 역설이다.
꿈은 자유로운 것이다.
창세기가 이제 절반을 넘어서자
“(저기~) 꿈꾸는 자가 나타났다”(창 37:19)
라는 기막힌 표현을 쓰고 있다.
꿈은 배워서 꾸는 게 아니다.
왜냐하면 그 이상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림도 매 맞으면 잘 그린다!
음악은 매 맞으면서 배운다는 게 이해가 되었는데,
그림도 매 맞으면 잘 그린다는 사실을 알고는 몹시 놀랐었다.
그러나 음악이든 그림이든 그 이상 경지의 표현은 ‘자유’로만 가능하다.
재즈와 그림에 능한 노예들은 대개 자유, 즉 꿈이 있었을 것이다.
남의 꿈이 아닌 자기의 꿈.
자기 자신의 진정한 꿈은
내가 임의로 지어내고 만들어낼 수 없는
타력(Hetero Esoteric)이라는 것이 또한 역설.
그 꿈이 자기 욕심(whiplash)인지, 심리적 망상(delusion/illusion)인지,
아니면 운명(predestination)인지는 ‘자유’로 판독 할 수 있다.
전자들은 대개 자유를 좀먹는 강박에 사로잡혀있게 마련이다.
에필로그.
* 이 글 원본은 지난 Lent 시리즈 중 27/40번째로 게시한 글이었는데(2015.3.20) 찾는 분이 있어 따로 블로그에 게시.
* 시편읽기: “내가 주의 법도를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행보할 것이오며”(시편 119:45)
* 제목: 꿈꾸는 자 | 창세기 37장 19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