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이 글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에 관한 소고입니다. 제가 사실 며칠 전에 좀 다쳤습니다. 주차장 눈 밭에 묻힌 타이어 가이드 패킹을 미처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져 입술을 다쳤어요. 오랜만에 느끼는 순식간의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순식간의 상황에 스치는 의식을 잘 포착하는 편이에요. 그 의식이란 언제나 이런 겁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 […]
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이 글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믿는 것에 관한 소고입니다. 제가 사실 며칠 전에 좀 다쳤습니다. 주차장 눈 밭에 묻힌 타이어 가이드 패킹을 미처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져 입술을 다쳤어요. 오랜만에 느끼는 순식간의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순식간의 상황에 스치는 의식을 잘 포착하는 편이에요. 그 의식이란 언제나 이런 겁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 […]
전병욱 목사의 저서 <강점으로 일하라>는 20년 전 청년이었던 기독교인에게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책이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목회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도통 책 안 읽는 청년도 옆구리에 뭘 하나 끼고 있어 “뭐 읽니?”하고 물으면 이 책을 꺼내보였던 기억이다. 수많은 청년에게 청년다운 꿈과 희망을 불어넣은 베스트셀러였을 것이다. ‘강점으로 일하라’의 내용 내용을 잠시 훑어보면,
전병욱 목사의 「강점으로 일하라」 이후 20년 더 보기 »
이 글은 ‘파라클레토스는 어떻게 출현하게 되었나?’라는 주제로 작성했던 전편에 대한 속편이다. 이 글의 제목을 당초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출현 동기, ‘탄식’”이라고 지었다가 “누가는 왜 파라클레토스의 출현 장면을 방언(통역)으로 특정했나?”로 수정했다. 이 모든 심층적인 의미의 층을 더 잘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출현 동기, ‘탄식’”이 원래의 제목임을 독자는 유의하시기 바란다. 파라클레토스/보혜사의 어원 보혜사는 중국말이다. 어감 자체가 구식인데다 이단들이
누가는 왜 파라클레토스의 출현 장면을 방언(통역)으로 특정했나? 더 보기 »
목사(牧師) 기원에 관해 논할 때는 ‘목사’라는 명칭에 관한 전래와 목사라는 직무에 관한 유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목사라는 국문 명칭은 번역자의 상당한 전제가 작용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국문 성경에서는 이 명칭이 딱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목사’라는 용어의 전래(傳來) 목사(牧師)라는 말은 유능한 관료에게 부여 했던 명칭이다. 행정 능력뿐 아니라 덕을 통해서 백성을 이끈 관리에게 주어진 중국말에서
‘유쾌하게 되는 날’이란 표현은 종교적 표현 치고는 매우 독특한 표현이다. 신구약을 통틀어 딱 한 번 나오는 아나프시크시스(ἀνάψυξις)를 번역한 말이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에서 등장한다. 베드로의 설교에서의 ‘유쾌하게 되는 날’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그러므로
‘유쾌하게 되는 날’(행 3:19)은 정신승리를 말하는 것인가? 더 보기 »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은 계시록 3장,문을 그냥 통과하신 예수님은 요한복음 20장, 두 도상은 서로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안식 후 첫날 저녁 때, 제자들이 모인 곳 문들을 다 닫아 걸고 있었다는 성서일과 중 한 대목을(요 20:19-31) 읽다가 문득 옛 생각이 떠올랐다.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 가정에서의 공동체 모임을 5년 정도 지속하다 바깥으로 나와서 모일 때의 일이다. 예배를
문을 두드리는 예수님과 그냥 통과하신 예수님 차이 더 보기 »
부활절. 미문(美門)의 이름으로 가정에서 처음 시작했던 예배가 부활절 예배. 난생 처음 단독으로 교회라는 걸 시작하고서는 식물에 대한 관심을 목회와 동기화(synchronization)하는 태도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도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목회를 마무리하면서는 식물에 대한 관심이 즉시 해제(asynchrony) 되었다. 식물이 말라 죽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없던 이전의 상태로 복귀한 것이다. 식물에 무관심했던 감성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성으로 이행했다는 자기애를 목회와 결부시키고
가룟 유다가 떡 한 조각을 받고서 행동을 개시했다는 이야기 전개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막 14:20; 마 26:23)가 예수 자신을 파는 자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자신이 그를 지명하듯이 나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조각을 받은
아리마대 요셉은 네 복음서에 공히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다. 중요한 인물이란 뜻이다. 무엇으로 중요한가? 그리스도의 매장(埋葬)과 관련 있다. 정확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정위된 위치로서 중요성이다. 대부분의 종교적 열심은 부활에 매몰되거나 죽음에만 매몰되기 마련이다. 죽지도 않고 부활하려들거나 부활을 조건으로 죽는 행태이다. 위서 속의 아리마대 요셉 나는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빌라도에게서 주 예수의 시신을 장사 지낼 수 있게
근래 기독교의 투쟁적인 면모를 감안하면 사랑이라는 근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주제를 꺼내기가 민망할 정도이지만,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것이 결코 기독교 사랑은─ 그것이 아가페이든 필레오이든 ─아니라는 점에서 요한복음의 필레오 관한 몇 가지 특수한 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 일단 한 줄 요약 해놓고 시작하면, 이 요한복음의 필레오 용법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기에 몹시 어려워진다는 사실이다. 구약에서의 아가페 사랑과 필레오 사랑
필레오 사랑─구원받기 어렵게 만드는 요한복음의 필레오 더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