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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쾌하게 되는 날’이란 표현은 종교적 표현 치고는 매우 독특한 표현이다. 신구약을 통틀어 딱 한 번 나오는 아나프시크시스(ἀνάψυξις)를 번역한 말이다. 베드로의 두 번째 설교에서 등장한다.

베드로의 설교에서의 ‘유쾌하게 되는 날’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행 3:15-19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가 오순절에 임한 성령 강림의 현상에 관한 변증이었다면, 두 번째 설교는 미문에서 구걸하는 걷지 못한 자를 일으켜 세운 직후 그 능력에 관한 변증이다. 첫 번째 설교 직후에는 재산과 소유를 팔아 필요에 따라 나눠 주는 즉각적인 조처를 취했다면, 이 두 번째 설교에서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며 첫 설교 때의 즉각적인 조처와는 사뭇 다른 해법을 내놓는다. ‘유쾌하게 되는 날’이 임할 것이라는 것이다.

두 설교는 연속적으로 나열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시간적인 간격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무상 복지는 베풀 수 없다. 복음의 본질도 아니라는, 뭐 그런 건가.

그렇기에 베드로의 첫 번째 설교 청중보다는 두 번째 설교의 청중이 우리 현대 기독교인과 더 잘 들어맞는다. 무상 복지로는 이제 더 이상 마음이 움직이지 아니하며, 퍼줘도 퍼줘도 뭔가에 부어터져 있으되, 주던 것 안 주면 칼부림 나는 영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설교 맥락에 따르면 ‘유쾌함’이란 고작 회개하면 얻게 되는 상쾌함인 것만 같다. 그게 아니라면 무엇인가? ‘천국에서 만자보자 그날 아침 거기서…’를 말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것이 정신승리 아니고 무엇인가? 기독교인이 추구하고 배워온 구원과 ‘유쾌함’이 대체 무슨 연관이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본질은 질고(疾苦) 가운데 죽게 되는 것, 그것이 참된 것이라 배우지 아니하였던가?

그걸 의식해서인지 개정판에는 다른 말로 고쳐놓았다.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개역개정

현대 교회에서의 ‘유쾌하게 되는 날’

이처럼 잇달아 휘몰아치는 추궁 때문에 현대 교회에서 취한 조처는 대략 두 가지로 집약된다. 하나는 더 더 나은 복지에 온 힘을 쏟아 붓는 일이었다. 다양한 구제 사업, 다양한 교육 사업… 고도화된 각종 사회적 프로그램으로 사람을 ‘유쾌하게’ 만들고자 노력하였다. 또 다른 조처는 심리 요법을 도입하는 일이었다. ‘유쾌함’을 심리적인 쾌(快)로 이해한 나머지 잔뜩 뿔이 나 있는 현대인의 사이코패스 기질을 달래는데 남은 힘을 쏟아 부었다.

첫 번째 조처는 교회 또는 목회자가 아나프시크시스의(유쾌하게 하는) 권능을 상실했어도 힘 있는 교회요 힘 있는 목회자로 보일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다. 두 번째 조처는 이 유쾌함, 즉 ‘아나프시크시스’를 카타르시스(κάθαρσις)와 동일시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현대인은 카타르시스에 담긴 본질마저 오용하고 있지만 어쨌든 현대적 의미의 카타르시스가 ‘요법’으로 통용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목회자들은 베드로가 말한 ‘유쾌함’을 일종의 요법으로 전락시켰다.

대체 이 ‘아나프시크시스’란 무엇인가?

아나프시크시스/유쾌함의 본질

배드로의 두 번째 설교를 다시 상기하면 그 유쾌함은 ‘죄를 회개하는 것’과 관련 있다.

그게 ‘고작’ 죄를 회개함이란 말이더냐?라는 반응이 마음에서 올라온다면 그는 ‘복지’와 ‘요법’에 길들여진 기독교인임에 틀림 없다.

유쾌함/아나프시크시스는 뭔가 엄청난 영적인 의미 또는 심리/형이상학적인 의미의 용어가 아니다. 현대적인 의미로 보나 고대적 의미로 보나 그 어휘가 가진 유쾌함은 ‘호흡’과 관련 있다.

이 유쾌함이 별 것 아니게 느껴지는 것은 어휘나 회개의 문제라기보다는 현대인이 처한 환경 탓일 것이다. 사실 현대인은 도저히 이 의미나 기분을 알 수 없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강퍅함에 전복되어 있는 까닭이다. ‘회개’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지만 회개하더라도 그것이 삶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 또한 현대 기독교인은 잘 알고 있다. 아무리 봐도 ‘정신승리’인 셈이다.

따라서 우리 현대인에게 이 의미의 전도는 순방향보다는 역방향을 통해서 살피면 잘 전달될 것이다.

이 헬라어 아나프시크시스는 히브리어 중 라바카(רְוָחָה)와 동의어이다.

그것은 열 가지 재앙이 휘몰아쳐도 절대 굽힐 수 없었던 바로의 강퍅함을 하나님이 잠깐 숨통을 트게 해주었을 때 파라오가 느꼈던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바로가 숨을 통할 수 있음을 볼 때에 그 마음을 완강케 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출 8:15

첫 번째 피의 재앙이 들이닥치고 연이어서 온 사방에 개구리 떼가 덮치는 통에 숨을 쉴 수 없을 때, 파라오는 모세에게 유화적인 제스쳐를 보낸다. 그때 잠깐 재앙이 그친다. 바로 이 숨통이 트이는 그 순간을 라바카/아나프시크스/유쾌한 순간이라 일컫는다. 이 순간이 별 값어치 없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파라오와 같은 강퍅함에 잠식되어 있거나, 무상 복지의 중독 증세 때문일 것이다.

사도들에게 있어서 부활한 주님과의 재회는 어떤 신학적 만남이나 형이상학적 천국의 성취가 아니라, 그냥 좋은 것이었다. 그 순간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저희가 너무 기쁘므로 오히려 믿지 못하고 기이히 여길 때에 이르시되 여기 무슨 먹을 것이 있느냐 하시니

눅 24:41

반가운 사람, 죽은 줄만 알았던 사람을 만났을 때의 기쁨과 유쾌함을 우리는 지나치게 신학화 형이상학화 하는 강퍅함에 빠져 있는 것일 수 있다. 그것이 복지와 심리요법이라는 대안을 낳았다.

주님을 만났을 때 숨통이 트일 정도로 반가울까?

베드로가 말했던 ‘유쾌함’이란 주님과의 관계와 그 반응에 대한 상대적인 호흡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것이 아니다. 누가 구원이 손쉽다 하였는가.

유쾌하게 되는 날

부활 후 3주차 | 성서일과, 제1독서 행 3:12-19; 시편 시 4; 제2독서 요일 3:1-7; 복음서 눅 24:36-48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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