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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牧師) 기원에 관해 논할 때는 ‘목사’라는 명칭에 관한 전래와 목사라는 직무에 관한 유래를 구별할 필요가 있다. 목사라는 국문 명칭은 번역자의 상당한 전제가 작용한 용어이기 때문이다. 국문 성경에서는 이 명칭이 딱 한 번 밖에 나오지 않는다.

‘목사’라는 용어의 전래(傳來)

목사(牧師)라는 말은 유능한 관료에게 부여 했던 명칭이다. 행정 능력뿐 아니라 덕을 통해서 백성을 이끈 관리에게 주어진 중국말에서 전래하였다. 공교롭게도 성경에서 ‘양치기’를 지칭했던 그 의미와도 꼭 맞는 명칭이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의 실용적으로는 ‘양치기’(목동)가 아닌 존칭이었다.

목사라는 개념은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에도 등장한다.

<목민심서>에서는 중앙 정부에서 파견한 지방의 수령이 바로 목사(목민관)이다. 책의 콘텍스트는 지방의 수령/우두머리뿐 아니라 하급관료, 지방의 토족이나 선생들의 덕망을 지향할 때 쓴 명칭이다. 이른바 목사들의 재물욕이나 권력에 대한 욕심을 경계한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런 명칭이 한국 교회사(史) 초기에 도입되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목민심서에 따르면 다산은 어디까지나 철저한 벼슬아치 입장에서 백성을 불쌍히 여겨한다는 논조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목사’를 벼슬아치로 고려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목사를 한글의 사전적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나 목민심서식 목사로 이해하는 것에는 성경에서의 목사와 괴리가 있다. 성서에서 말하는 목사 포이멘은(ποιμήν)은 벼슬아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껏 안수 받은 사람에게 ‘목동님’, ‘양치기님’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겠지만.)

‘목사’라는 용어의 성경적 전래(傳來)

성경에서 ‘목사’라는 국문이 나오는 곳은 딱 한 구절이다.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 4:11

이 문장 상으로 보면 목사는 존재감이 없다. 서열로도 후미에 가 있고, 여러 주요 직책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의 ‘목사’가 지닌 위상과는 많이 다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여러분이 만약 목사직을 비 성서적이라고 본다면 큰 오류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생각이 더 비 성서적이다. 그뿐 아니라 새삼 저 서열이라도 의식한 듯 오늘날 자신을 가리켜 ‘사도’ 혹은 ‘선지자’로 부르도록 하는 것 또한 심각한 오독이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참칭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사도’ 혹은 ‘선지자’라는 직무에서 ‘집사(라고 불리게 될)’ 직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선명하게 보전하고 있는 문헌이 바로 누가의 복음서와 행전(사도행전)이다. 열두 제자(혹은 사도)에서 일곱 집사(라고 불리게 될) 직군으로 모종의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초반에 군림하던 베드로의 위상은 온데간데없고 사울이라 불리던 바울이 마지막 사도의 위상을 종결 짓는 구조이다. 사도는 보편화된 것이다. 보편화된 직무를 다시 승격시켜 자신만을 지칭하도록 지시하면 그것이 바로 참칭이다.

그러므로 현대적 의미에서 통용되는 ‘목사’라는 직무적 명칭은 용어적 측면의 전래라기보다는 전통에 의거한 전래라 보는 것이 타당하다. 여러분이 속한 교회의 ‘목사’는 목민심서의 빠롤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의 랑그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목사’라는 용어의 성경적 유래(由來)

목사라는 명칭의 기원은 요한복음 10장에 두는 것이 올바르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요 10:11-12

여기서의 ‘목자’란 명칭에 사용된 단어는 상기의 에베소서 4:11에서의 ‘목사’와 같은 단어이다.

여기서의 ‘목자’는 한낱 ‘목동’, ‘양치기’로만 보기에는 <목민심서>만큼이나 높은 지위에 지향점을 두고 있다. 벼슬아치라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자신의 지위를 이 직무/직임으로 표명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목사를 우습게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직무에 대한 수임자가 여러분의 목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목자’를 헬라어 그대로 옮기면 호 포이멘 호 칼로스(ὁ ποιμὴν ὁ καλός)라고 한다. 어찌하여 ὁ ποιμὴν καλός라고 쓰거나 καλός ποιμὴν라고 쓰지 않았을까. (참고로 ποιμὴν는 ‘목자’이고 καλός는 ‘좋은’ 이다. 그리고 ὁ 관사이다. )

만일 ὁ ποιμὴν καλός라고 썼다면 ‘좋은’이란 이미지는 그 목자가 가진 인/성격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신 ‘선한 목자’에서 ‘선한’은 목자라는 직무가 가진 속성 자체를 표지한다. 그것은 마치 ’선생님’을 뜻하는 디다스칼로스(διδάσκαλος)가 ‘좋은’이란 뜻의 칼로스(καλός)를 품고 있는 원리와도 같은 것이다. 선생님이란 ‘좋은 선생님’이 ‘선생님’이다. 인간성 좋고 성격 좋은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 아니라 ‘선생님’ 자체가 ‘좋은 선생님’이란 뜻이다.

여기서의 ‘선한 목자’란 그런 뜻이다. 선한 목자도 있고 나쁜 목자도 있는데 그 중 선한 목자란 뜻이 아니라 목자가 선한 목자이다.

이 말은 인간성 좋고 성격 좋은 사람이 목자 되는 것이 아니라, 목자이기 때문에 좋은 속성이 되는 원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직무의 원리를 밝혀주는 대항적 직무가 바로 삯꾼이다.

사실 초기의 번역자들이 ‘삯꾼’이라는 용어를 채택함으로서 다소 비하적인 의미로 작용하고 말았지만, 삯꾼 미스토토스(μισθωτός)는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다.
단지 직원일 뿐.

이를 테면 근래 목회자로 근무하던 자들 중에 ‘노동자’ 연대를 구성하는 자들이 있다.
노동자가 나쁜 사람들인가?
단지 직원일 뿐.

‘목사’라는 직무에 관한 올바른 이해

이것이 ‘목사’에 관한 성경적 용법이다.

상기에서 살펴볼 때 ‘목사’라는 명칭은 정치/행정적 유래라기보다는 다분히 제자도의 유래임을 알 수 있다. 이 제자도를 기반으로 명시적 정치와 행정의 책임을 위임 받는 직무가 바로 여러분이 속한 교회의 목회자이다.

상기의 요한복음 10장에서의 유래 대로 예수께서 (양을 위해 죽는) ‘선한 목자’되심을 그 제자들이 위임 받는 것이다.

그리하여 목사는 다섯 가지 특별한 역할을 관장한다. 케리그마(κηρυγμα), 예수님이 주 되심을 선언하고 증거하는 일이다. 다음은 레이투르기아(λειτουργια)이다. 예배를 관장하는 직무이다. 다음은 파이데이아(παιδεια) 곧 교육을 말한다. 다음은 디아코니아(διακονια), 봉사를 말한다. 여기에서 ‘집사’라는 명칭이 나왔다. 그리고 코이노니아(κοινωνια)이다. 교제하는 일을 말한다. 즉 평신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평신도처럼 나가거나 떠날 수 없다.

‘평신도’란 명칭은 그래서 상대적인 용어이다. 어떤 사람들은 ‘평신도’란 말을 올바르지 않게 여기는 경향이 있지만,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이 평신도 아니면 뭔가? 목사인가?

에필로그

다음 도상은 ‘목사’라는 명칭이 중국책이나 목민심서에서 등장하듯이 성경 바깥, 기독교 바깥에서 등장하던 ‘선한 목자’ 도상이다. 아마 가장 오래된 도상일 것이다.

목사(牧師)의 기원
고대의 ‘선한 목자’ 도상

참조할 글: 목사(牧師)의 기원 (2)

부활 후 4주차 | 성서일과, 제1독서 행 4:5-12; 시편 23; 제2독서 요일 3:16-24; 복음서 요 10: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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