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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병욱
강점으로 일하라(2002, 규장)

전병욱 목사의 저서 <강점으로 일하라>는 20년 전 청년이었던 기독교인에게는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한 책이다.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젊은 목회자 중 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도통 책 안 읽는 청년도 옆구리에 뭘 하나 끼고 있어 “뭐 읽니?”하고 물으면 이 책을 꺼내보였던 기억이다. 수많은 청년에게 청년다운 꿈과 희망을 불어넣은 베스트셀러였을 것이다.

강점으로 일하라’의 내용

내용을 잠시 훑어보면, 그는 당시 월드컵 국가대표팀의 주역이었던 히딩크 감독을 소개하며 강점으로 일하는 중요성을 피력하되 책을 IV부로 나누어, I부 ‘강점으로 일하는 자를 요청하는 시대’에서는 청년들의 실패를 격려하고 강점의 당위성을, II부 ‘강점으로 일하는 자의 출사표’에서는 영적인 성숙과 묵상을 통한 영적 전쟁의 준비를, 그리고 III부 ‘강점으로 일하는 자의 영적 전쟁’에서는 실전의 적용을, 끝으로 IV부 ‘강점으로 일하는 자의 승전보’에서는 역전과 승리의 삶을 위한 회개로써 짜임새 있게 마무리한다.

이 책의 주된 모티프는 ‘삼손’이다. 전 목사에 따르면 삼손은 선천적 강점을 타고났지만 약점으로 일해서 실패한 케이스이다. 그는 정욕대로 일한다. 하나님에게 얻어 맞는다. 이런 실패를 극복하는 것이 바로 기도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면서도 전 목사는 자기 화법의 강점인 “사명을 즐겨라”, “(강점으로 하는) 일에 투자하라”, “현실에 안주하지 마라” 등 청년에게 역동을 부여한다.

강점으로 일하라’ 이후 20년

벌써 20년 세월이 흘렀다. ‘강점으로 일하라’는 여전히 유효한가?

인간은 간사하다. 전 목사의 메시지에 감동과 역동과 영향을 받았을 수많은 기독교인이 전혀 안 읽은 것처럼, 전혀 영향 받지 않은 것처럼 굴기 때문이다. 전 목사는 저술에만 능했던 게 아니다. 설교에도 탁월했던 것으로 안다. 사실 나는 방송 설교라는 걸 청취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 들어본 적이 없지만, <지선아 사랑해>의 이지선 교수는 전신화상으로 사선을 넘나들 때 무너져내린 피부로 병상에 누워 이 분의 설교로 버텼다고 전한다. 화자의 인격은 인격이고 메시지는 메시지이다. 인격에 실패했다고 메시지에 담긴 성령의 역동과 성사가 무효화 되는 것은 아니다. 강점으로 일해서 실패를 극복하고 승전보를 경험했다면 그 자체는 생명이다.

다만 본 글은 ‘강점으로 일하는 자’들의 약점을 밝히는 글이다. 20년이 흐른 지금 그 약점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한 유능한 목회자의 퇴조로 내어 준 빈자리는 우리 사회의 이념과 청년들의 생각을 강탈당하는 틈새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에 ‘강점으로 일하라’를 넘어 다음과 같은 ‘약점으로 일하라’의 진수를 함께 숙고하면 진정한 강점이 무엇인지, 여러분의 강점은 더욱 강점으로 빛날 것이다.

‘약점으로 일하라’의 진수

바울이 말한 약점/ 아스테네이아(ἀσθένεια)는 오늘날 의료 분야에서도 사용하는 용어이다. 무기력증(asthenia)에 관한 전반적인 표현에 쓰인다. 이 무기력함은 정신에서 올 수도 있고 신체를 통해서 올 수도 있다. 현대 신학자들은 바울이 말한 아스테네이아가 과연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고대인인 바울의 신체와 정신을 CT로 찍듯이 훑어 내린다. 어떤 사람은 그의 신체가 기형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또 어떤 사람은 그의 시력을 특정하고 안질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다른 어떤 사람은 심지어 성적인 유혹이었을 것이라고도 말한다.

바울의 약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삼손의 연인 데릴라처럼 탐문하는 것이다. 그것은 본질이 아니다.

이 아스테네이아의 본성은 성령의 은사 중의 하나이다.

바울이 말하기를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노라”고 말하였을 때, 그 성령의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연약함’이 바로 아스테네이아이다. 강점으로 일하는 강자에게는 이게 없다. 바울이 이 아스테네이아에 관해 ‘육체의 가시다’라고 선언하기까지 그가 받은 응답은 이것이었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지기 때문이다”

고후 12:9

예수님의 직접 어록이다. 여기서 ‘내 능력’은 우리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의 능력을 말한다. 그분의 능력은 언제나 ‘(나의) 약한 것’(아스테네이아)’에서 비롯된다는 원리이다. 강한 자는 이 은사를 알지 못한다. 프리드리히 니이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는 이 능력을 ‘노예의 도덕’(Sklavenmoral)이라고 정의하였다. 중도에 포기한 패배자 또는 강점으로 일하는 위선자들의 도덕이라는 뜻이다.

바울은 놀랍게도 이것을 가리켜 앙겔로스 사타나(ἄγγελος Σατανᾶ) 곧 ‘사탄의 메신저’라고까지 표현했다(고후 12:7). 욥을 괴롭혔던 천사를 비유하였을 것이다. 그 정도로 혹독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기뻐한다!고 말한다(고후 12:9).

결과적으로 삼손은 그만 약점으로 승리를 거둔 셈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하나님이 블레셋 성전을 격파하기 위해 삼손을 난봉꾼으로 길렀다는 어불성설이 아니라, 약하고 실패하고 조각난 소명의 몽타주를 하나님이 마침내 맞추신다는 뜻이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고 했을 때 ‘온전함’ 텔레타이(τελεῖται)가 바로 몽타주의 ‘완성’을 이르는 말이다. ‘파괴한다’는 뜻도 되니 이는 우리의 ‘약한 것’을 파괴하는 힘이기도 하다.

부활 후 4주차 | 성서일과, 제1독서 삼하 5:1-5, 9-10; 시 48; 제2독서 고후 12:2-10; 복음서 막 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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