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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마대 요셉은 네 복음서에 공히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이다. 중요한 인물이란 뜻이다. 무엇으로 중요한가? 그리스도의 매장(埋葬)과 관련 있다. 정확히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사이에 정위된 위치로서 중요성이다. 대부분의 종교적 열심은 부활에 매몰되거나 죽음에만 매몰되기 마련이다. 죽지도 않고 부활하려들거나 부활을 조건으로 죽는 행태이다.

위서 속의 아리마대 요셉

나는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빌라도에게서 주 예수의 시신을 장사 지낼 수 있게 해달라고 청구한 그 사람입니다. 그 일로 인해 나는 살인자들과 하나님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들은 모세를 근거 삼아 고행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입법자에게 분노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해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고 하나님 아는 사람에게만 나타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정죄한 그 날 그리스도께서 고통당하기 7일 전에 강도 두 명이 여리고에서 빌라도에게 보내졌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의 진술’이라는 위서 중에서

이 인용문은 그가 유명한 인물이었다는 또 다른 근거이다. <아리마대 요셉의 진술>이라 불리는 위서의 도입부이다. 다른 위서인 <빌라도 행전>이나 <니고데모 복음서>에도 이 문헌 속 내용 일부가 나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것만 골라 좋아하는 학자들은 정경에 등장하는 아리마대 요셉이 저런 위서에서 유입된 파편으로 간주하는 연구 방법을 진리처럼 신봉한다. 그러나 이런 위서나 외경은 대개 성물 숭배와 발전하는 법이다. 아리마대 요셉의 전승은 ‘성배’와 관련 있다. 그가 예수의 피를 모아 보관했다는 전설이다.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것처럼 그가 예수님의 시신을 회수한 유일한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반증할 따름이다.

구약 속의 아리마대 요셉

미국에서 ‘죠셉’이라는 이름이 차고 넘치듯이 동시대 요셉이라는 인물을 누군가로 특정하는 것은 지나치게 광범위한 추론이다. 하지만 성경 속에서 우연히 어쩌다 튀어나오는 이름은 그렇지 않은 경우 만큼이나 드물다. 의미 있는 이름들이란 소리다.

요셉은 구약을 배경으로 하는 이름이다. 신약의 다윗(의 후손)이 구약을 배경으로 등장하듯이. 그리고 유다가 구약을 배경으로 한 이름이듯이.

구약에서 요셉이란 이름은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의 11번째 아들이 가장 유명할 것이다. 특히 창세기의 종장, 곧 마지막 톨레도트로 접어들면서 유다와 요셉의 대비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야곱의 유언에서도 둘의 관계는 긴밀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사실 12명의 아들에게 내린 야곱의 유언 중에 유다의 그것은 가장 난해한 본문일 것이다. (까닭 없이) 요셉만큼이나 분량도 많은데다 무엇보다 긍정형과 부정형이 섞이는 바람에 난해하다.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매며 그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또 그 옷을 포도주에 빨며 그 복장을 포도즙에 빨리로다 // 그 눈은 포도주로 인하여 붉겠고 그 이는 우유로 인하여 희리로다”

유다에게 내려진 이 예언 속에서 ‘사자’나 ‘홀’은 분명 명시적 메시아 상(像)으로 작용하지만(창 49:8), 앞서 르우벤과 시므온에게 발화된 저주의 사실적인 상징과 운율을 맞춘다면 유다에게 내린 이 예언도 다음과 같은 강한 부정의 형식을 띤다.

유다를 ‘사자’라고 한 것은 아버지 야곱에게 요셉이 짐승에게 먹혔다고 했을 때 그 짐승을 떠올린다. 그리고 그의 지팡이는 그가 다말과 약조한 부끄러움의 증표이며, 그의 나귀(ah-yeer)는 그의 악한 아들 엘(ayr)의 음가를 떠올리며, 포도즙에 적신 그의 복장은 마치 피에 적신 요셉의 겉옷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순수한 축복절(8절)과 충돌하는 상반된 입장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 상충되는 예언에 관한 보다 명시적 해명은 이미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역대기 역사가의 언급이다. 그는 괄호 쳐놓고 이렇게 말하였다.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대상 5:1-2)

1)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돌아갔으나 기록은 말라?!
2)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으나 장자의 명문은 요셉에게 (계속) 있다?!

이 무슨 모순된 말인가?

요셉은 명실상부 장자이지만 드러내놓고 장자로 기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는 다름 아닌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역대기 입장으로서는 북 이스라엘에 대한 부정적 입장 때문이겠지만, 이는 더 나아가 제2성전 시대에 남겨진 자(remnant)에 대한 부정적 견해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요셉의 장자권은 북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정통성으로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북 왕조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져가고, 남 왕조가 ‘유다’라는 이름으로 주저 앉은 전거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스라엘 역사를 이루는 기본 골격이다. 또한 그리스도 예수께서 메시아로 오시는 정위 지점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요셉이라는 인물은 역대기 저자가 자인했듯이 지워진 이름이요, 제2 성전 시대 예루살렘 성전 재건자들에 의해 제거된 이름이었던 것이다.

신약 속의 아리마대 요셉

신약에 들어와서 사라진 이름 요셉이 간접적이긴 하지만 가장 먼저 등장한 곳은 요한복음이다. 사마리아 여인의 입을 타고 ‘야곱의 우물’이라는 전승의 명칭으로 흘러나온다. ‘야곱의 우물’은 야곱이 아들 요셉에게 준 유산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으로 통칭되는 사마리아 정체성과 요셉 전승이 결합된 상태로 드러나는 것이다. 이 간접 진술 속에 등장하는 요셉의 이름이 직접적인 진술로 등장하는 대목이 바로 아리마대 요셉의 등장이다.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그 요셉이.

아리마대라는 위치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곳을 만약 ‘라마’ 이외 다른 지역으로 지목할 수 없다면, 그는 바로 실로에서 온 요셉이다.

실로(Shiloh).

“홀과 지팡이가 유다에게 있으되 ‘실로’가 오기까지”(창 49:10)라는 예언의 진정한 성취인 셈이다. ‘라마’는 사무엘의 고향이며, ‘실로’는 사무엘이 자란 성소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사무엘은 다윗을 캐스팅한 인물이다. 그는 바로 에브라임 지파였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요셉의 차자였지만 사실상 야곱에 의해 장(양)자권을 계승한 지파이다.

한마디로.

이집트의 요셉이 해골을 찾아 메고 올라가라 맹세시켰다면(창 50:25),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의 시체를 찾아 메고 가는 중이다.

네 복음서가 이 인물을 공히 빼놓지 않고 있음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막 15:43; 마 27:57; 눅 23:51; 요 19:38).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요셉이 부여 받은 ‘계약’의 성취에 상응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유다/다윗의 계약이 부차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요셉이 부여 받았던 ‘계약’ 자체가 추인해내는 힘인 것이다. 그것은 유다가 저질렀던 모종의 카르마 곧, 짐승에게 (살이) 먹히고 옷을 피(포도주)에 적신 동생의 수난을 대신 갚은 그리스도의 수난이기도 하다.

유다의 후손인 그리스도의 피에 적신 도상 속에서 유다가 동생의 옷을 피에 적시고 내려 받은 야곱의 예언 속 도상은 완성된다.

아리마대 요셉. 그가 이제 형님의 피에 적신 시신을 돌려 받으로 온 것이다.

이것은 죽음에서 부활로 이행하는 중간 지점으로서 그 본질을 적시한다.

종교적 열심이 죽음에 매몰된 자들은 자기 삶의 한(恨)을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환유하여 한풀이를 한다.

반면 종교적 열심이 부활에 매몰된 자들은 자기 삶의 회복을 순환하는 대지의 기운 정도로 이해한다. 그들에게 부활은 언제나 대지의 순환일 따름이다.

죽음과 부활의 중간 지점에서 죽음을 죽음으로, 부활을 부활로 갈라내는 것이 바로 아리마대 요셉의 신실성이다.

유대인은 ‘그분이 하나님인 사실을 알고도’ 죽였지만, 아리마대 요셉은 ‘하나님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도 장례를 준비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종려나무의 환호를 이 대중성을 상징한다.

하나님이 죽는 하나님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는 하나님을 죽이라고 표호하는 대중성인 것이다.

아리마대 요셉에게 부활은 조건이 아니었다. 이것이 그가 당돌하게 감행한 그리스도의 매장(埋葬)이었다.

성서일과, 제1독서 사 50:4-9; 시편 시 31:9-16 (118:1-2, 19-29─Palms); 제2독서 빌 2:5-11; 복음서 막 14:1-15:47 (Mk 11:1-11 or Jn 12:12-16─Palms)

아리마대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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