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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미문(美門)의 이름으로 가정에서 처음 시작했던 예배가 부활절 예배.

난생 처음 단독으로 교회라는 걸 시작하고서는 식물에 대한 관심을 목회와 동기화(synchronization)하는 태도를 나도 모르는 사이에 도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목회를 마무리하면서는 식물에 대한 관심이 즉시 해제(asynchrony) 되었다. 식물이 말라 죽더라도 아무런 감흥이 없던 이전의 상태로 복귀한 것이다.

식물에 무관심했던 감성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감성으로 이행했다는 자기애를 목회와 결부시키고 뭔가 꾀했던 부끄러움이 다음과 같은 기록들로 남아 있다.

식물의 아름다움은 내가 전개하는 아름다운 목회의 기호이다. 이제 그 아름다움을 좇아 독창적인 ‘미’(美), ‘문’(門)은 성장할 것이다. 때로는 식물의 생장에서 발견하는 원리로써, 때로는 벌레 먹고 병들어 스러져가던 식물을 회생시키고야 마는 자상함으로써.., 온갖 식물 쇼가 현시로 작용했다.

식물을 통해 꾀하던 이런 모든 페르소나의 현시가 교회 모임의 종결과 함께 종식된 것이다.


그러다 지난 해 여름부터 식물에 물 붓는 일이 다시 시작되었다.

한 지인에게서 받아온 분재로 인해 다시 시작된 것이다. 대체 내가 이것을 왜 받아왔던고.

주는 사람이 성의로 건내는 선물을 차마 거절할 수 없어 받아온 것이 2주일 만에 시들기 시작하더니… 죽어간다. 후회 막급이었지만 원래 주인이 이 작은 분재 하나를 얼마나 아끼는 줄 알기에 계속 물을 줄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가을도 되기 전에 상하기 시작한 잎사귀들은 대체 물이 많아 상한 것인지, 물이 부족해서 상한 것인지 파악조차 할 수 없다. 여름이 다 가기도 전에 잎은 다 떨어지고 없어졌다.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남은 화분에 매일 물을 주려니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너는 대체 산 것이냐, 죽은 것이냐.

그러다 지난 주 어느날 갑자기 보이기 시작한다.

부활

이 뜻하지 않은 봉오리에서 부활을 본다.

이 봉오리는 앞서 페르소나와 어떻게 다른가.

첫째, 이 식물은 사실상 죽은 것이었다. 죽은 줄로 알고도 물을 부었기 때문이다. 둘째, 그런 점에서 이 식물은 확실히 부활한 것이다. 물을 붓지 않았다면 죽음 그 상태로 고착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죽은 상태였는가 살아 있는 상태였는가는 중요한 작용을 일으키지 못한다. 부활은 그 ‘상태’가 결정지은 것이 아니라 내 행동의 지속성에 대한 반응으로 결정된 것이기 때문이다.

부활은 이처럼 수동태로 성립한다.

부활의 전승을 보전하고 있는 고린도전서 15장은 저 뜻하지 않은 봉오리의 수동태를 지지한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태반이나 살아 있고 어떤 이는 잠들었으며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고전 15:6-8

‘본다’를 뜻하는 호라오(ὁράω)의 수동태 오프테(ὤφθη, 보이셨나니)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진수이다.

부활은 재산의 부활이나 대지의 순환 또는 자기 페르소나가 아니라 바로 수동태인 것이다. 일종의 현현(Epiphany)이다.

저 꽃봉오리처럼 보여주지 않으면 볼 수가 없는 법이다.

많은 사람이 부활을 자신이 구현하는 임의의 능동태로써 볼 수 있다고 착각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부활은 수동태이다.

ὤφθη κἀμοί.

주님이 보여주지 않으면 볼 수 있는 방도가 없다. 저 봉오리처럼.

십자가 죽음은 만천하에 공개된 사건이고, 부활은 제한된 소수에게만 보이는 사건이라 한 것은 이 수동태를 이른 말이다.

부활절 | 성서일과, 제1독서 사 25:6-9; 시편 시 118:1-2, 14-24; 제2독서 고전 15:1-11; 복음서 요 20: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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