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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룟 유다가 떡 한 조각을 받고서 행동을 개시했다는 이야기 전개는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내용이다. 다른 복음서에는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자”(막 14:20; 마 26:23)가 예수 자신을 파는 자이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예수 자신이 그를 지명하듯이 나온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 이에 예수께서 유다에게 이르시되 네가 하는 일을 속히 하라 하시니

요한복음 13:26-27.

여기서 ‘조각’으로 번역된 프소미온(ψωμίον) 역시 요한복음에서만 사용된 어휘이다. 저자 요한이 이 독특한 표현을 가져온 의도가 무엇인지 용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디세이아에서의 한 조각

프소미온이 발견되는 가장 오랜 문헌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Ὀδύσσεια)에서이다.

오디세우스가 에게 해를 건너다 한 섬에 상륙한다. 동굴을 발견하고 들어가보니 폴리페무스라 부르는 퀴클롭스(외눈박이) 거인의 거처이다. 폴리페무스는 다행히 양을 치러 나가서 그틈에 부하들은 도망치자고 했으나 오디세우스는 그곳에 머문다.

어느새 동굴로 돌아온 폴리페무스는 입구를 바위로 닫아버린다. 꼼짝 없이 갇힌 12명은 폴리페무스에게 발각되고 오디세우스의 부하들은 하루에 두 명씩 폴리페무스의 먹이가 된다.

오디세우스는 기지를 발휘해 폴리페무스를 안심시키고 포도주를 먹여 잠을 재우는데 성공한다. 바로 이 대목에 ‘프소미온’이란 단어가 등장한다.

ψωμοί τ᾽ ἀνδρόμεοι

Odyssey 9.374

우리말로 옮기면 ‘사람 조각’이란 뜻이다.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무스가 포도주를 마시다가 입안에 들어 있는 사람 고기 조각을 토하는 장면이다.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무스의 눈을 찌르고 탈출에 성공한다.

세르베루스의 먹이 한 조각

고대로부터 세르베루스의 먹이(Sop to Cerberus)라는 표제어가 있다. 여기서 먹이(sop)이가 또한 프소미온이다. 케르베루스(Κέρβερος)라고도 불리는 신화적 동물 세르베루스는 개다. 바로 지옥의 개(hound of Hades).

지옥 문을 지키는 이 무시무시한 개는 죽은 자의 영혼이 절대로 되돌아갈 수 없는 그 경계 지점, 하데스의 입구를 지키는 개이다. 머리는 세 개이며 꼬리는 뱀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트로이의 전쟁 영웅 아이네이아스(Aeneias)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하데스로 들어갈 때 안내자 시빌(Sybil)이 수면제 묻힌 먹이에 꿀을 발라 이 지옥의 개 세르베루스에게 던져주고는 그 곳을 무사히 통과할 수 있었다.

요한복음에서 ‘조각을 적셔ㅡ’(요 3:26)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한마디로 치명적인 인물, 뭔가에 잔뜩 부어 터져 있어 뭔가 저지르려는 사람 앞에 두는 조각을 이르는 말로서 결코 그가 돌이킬 수 없는 자리로 들어선 단계를 상징할 것이다.

가룠 유다

요한복음에서의 한 조각

개역성서에서는 ‘한 조각’이라고 되어 있던 것을 개역개정판에서는 ‘떡 한 조각’이라고 개정하였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한 조각을 찍어다가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찍으셔다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주시니

개역성서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떡 한 조각을 적셔다 주는 자가 그니라 하시고 곧 한 조각을 적셔서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에게 주시니

개역개정

개정을 안 한만 못 하다. 현대 그리스어에서 프소미는 ‘빵’을 지칭하지만 성경 시대인 코이네 그리스어에서는 단지 ‘조각’을 의미하는 것이다. 분명 요한복음의 현장에서 그 조각은 빵의 의미를 포함하지만 저자 요한은 ‘조각’이란 용어로 엄선한 것임을 유의해야 한다.

이 한 조각은 오병이어에서의 빵 조각과는 다른 것이다.

오병이어의 빵 조각, 클라스마(κλάσμα)는 다 먹고 남아도 바구니에 담지만, 가룟 유다가 받은 한 조각은 다시 담을 수 없다. 지옥의 개 세르베루스의 먹이처럼, 폴리페무스 입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의 살 조각처럼 적셔졌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핏자의 한 조각과도 같은 것이다. 핏자를 주문하면 언제나 조각을 내어 가져오지 않던가. 그 중에 어떤 조각을 잡을까.

누가는 “가룟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갔다”(눅 22:3)고 했고 요한은 “마귀가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다”(요 13:2)고 했다. 예수께서는 이 한 조각을 통해 그 마음과 생각을 촉진한다(요 13:26).

예수께서 저주를 주도한다는 뜻이 아니다.

이는 그 자신이 장차 받게 될 고난이 악의 주도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명시이다. 이 명시성이 바로 ‘한 조각’이다.

약정된 여러 조각 중 ‘한 조각’일 뿐이다.

문제는 그 조각을 누가 받느냐의 문제일 텐데, 가룟 유다는 가룟 유다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 한 조각이 정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가룟 유다의 아버지 이름이 시몬임을 유일하게 밝히는 것이 요한복음인데 이는 가룟 유다의 배신과 시몬 베드로의 배신을 구조적으로 같은 비중으로 다루려는 의도와 관련 있다.

두 시몬은 예수 그리스도를 동질한 무게감 속에서 배신했지만 회개한 베드로와는 달리 가룟 유다는 자살함으로써 마귀의 입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살 조각이 되고 말았다.

고난 주간/ 수요일 | 성서일과, 사 50:4-9a; 시 70; 히 12:1-3; 요 13: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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