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천국과 지옥은 어떤 곳인가

‘광야’는 인간의 삶을 ‘여정’(Living a Nomadic Life)의 한 양상으로 정의하는 방식의 원형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지엽적이지만 그들의 선조가 광야에서 남긴 종교적 의미는 오랜 세월 보편화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그들의 광야 생활 40년에서 가장 극적인 고난의 순간이 담긴 장면은 민수기 21장 4-9절일 것이다. 20장부터 이어져 온 고통스러운 상황의 귀결이 위로와 보상보다는 불순종의 전형으로 표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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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쉐레트 다바림(10개의 말들)─십계명

‘십계명’이란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아마 다들 “‘출애굽기 34장 28절이나 신명기 4장 13절이나 10장 4절에 나오는 ‘십계명’은 뭐냐?”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아쉐레트 다바림(עֲשֶׂ֖רֶת הַדְּבָרִֽים) 곧 ‘10개의 말들’이지 미츠바(מצוה)나 호크(חוֹק)나 미쉬파트(משפט)가 아니다. 계약법을 미츠바, 종교 계율을 호크/후카, 사회법을 미쉬파트라고 분류한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우리에게는 ‘십계명’으로 알려진 이 ‘아쉐레트 다바림’(10개의 말)은 약간 다른 개념이다. (그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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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의와 성화는 다른 것인가

가령, 이제…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ㅡ라고 하였을 때 이는 성화(sanctification)의 본문인가? 칭의(Justification)의 본문인가? 칭의와 성화가 분리된 성서적 근거는? (강요[Institutio] 말고…로마서 중심) 그러면 성화(ἁγιάζω)는 완성된 것인가? 미완성된 것인가? 엄밀한 의미에서 칭의와 성화는 단일한 것이다. 다음의 개요를 유념할 것이다. 1. 기독교인의 구원은 ‘천당(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속성의 변화이다. 2. 적어도 로마서에 따르면 인간은 단 한 번(ἐφάπαξ)의 변화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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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이란 무엇인가

예정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지나치게 ‘예정’에 민감한 이유는 예정을 일종의 ‘점지하는’(산신령과 부처님이 정해줬다) 행위로 오해하는 까닭일 것입니다. 가령,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ㅡ” ㅡ라 하였을 때, 우리를 장악하는 것은 예정만이 아닙니다. 뜻, 계획, 예정. 이 셋이 우리를 장악합니다. 여기에 서열을 정하면, 2) 뜻, 1)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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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행, 간음, 이혼, 재혼

이 글은 이혼과 재혼 규정에 관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의 논점 차이를 밝힌 글이다. 우선 마가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이것이 여성에게 불리해 보이는 이유는, 남성이 새 여자와 재혼을 했는데도 그 영향이 이전 아내에게 미치는 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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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므온(Συμεών)에 관한 기호와 해석

해석이란 무엇인가? 해석이란 길을 내서 걷는 일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유년 시절에 생각하기를 사람이 오랜 세월을 살다보면 이 세상의 모든 길을(심지어 골목길까지) 한번쯤은 반드시 밟고 지나가게 될 것이라 여겼다. 그것이 헛된 망상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쯤 인간은 누구나 매우 한정된 길과 공간을 맴돌다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무수히 많은 지식을 접하고 경험하고, 무수한 지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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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의 “가정불화” 본문주석

    신약성서에 나오는 ‘가정불화’ 본문은 두 가지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둘은 같은 어록(Q)이지만 다르게 다루고 있다. 이 글은 누가복음 중심의 주석이다. 우선 마태의 본문부터 볼 필요가 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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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의 ‘주기도문’은 마태와 어떻게 다른가

누가의 ‘주기도문’은 마태와 어떻게 다른가─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13절에 수록된 기도문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주기도문’ 텍스트는 누가복음에도 보전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이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어떻게 다른 지에 관해 정리한 글입니다. 해석학 이론에 관한 해석 예시이기도 합니다. 주기도문은 부적인가? 언젠가 미국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 시의회 회의장에서 어떤 자가 사탄을 소환하는 기도를 하자 주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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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받은 ‘아포칼립시스’(ἀποκάλυψις, 계시)

    바울은 살아생전에 평생을 정체성에 시달렸다. 그가 과연 사도인가? 라는 문제인데 자고로 사도라 함은 두 가지 요건 즉, 실존 예수의 목격자이면서 그분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실이 있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베드로나 주의 형제 야고보 같은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도성(apostleship)문제는 복음 전도 때 겪는 일반적인 장벽과는 별개로, 그가 전하는 복음의 정통성 문제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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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구원―칭의(“의롭다 하다”)

    근간에 기독교인의 타락을 알리는 잦은 소식으로 공연히 ‘칭의’의 교리가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이란 중생과 변화를 수반하기 마련인데 구원 받은 자가 어찌 저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구원의 진리인 칭의는 구원된 신분을 표지하는 정의이지, 그 개개인의 윤리를 표시하는 지표가 아닙니다. 칭의(δικαίωσις, 동사 δικαιόω /의롭다고 하다)라는 단어는 본래 바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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