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에 나오는 ‘가정불화’ 본문은 두 가지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둘은 같은 어록(Q)이지만 다르게 다루고 있다. 이 글은 누가복음 중심의 주석이다.
우선 마태의 본문부터 볼 필요가 있다.
“34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태복음 10:34-36.
다음은 누가의 본문이다.
“49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50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51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하게 하려 함이로라 52 이 후부터 한 집에 다섯 사람이 있어 분쟁하되 셋이 둘과, 둘이 셋과 하리니
53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딸과, 딸이 어머니와,
시어머니가 며느리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분쟁하리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2:49-53.
여기서 등장하는 아버지, 아들, 어머니, 딸….은 아마도 미가서에서 인용해온 본문일 것이다. 당대의 종말 현상을 예지했던 미가의 예언을 신약성서 저자들이 석의하고 있는 셈이다. (오늘날 시한부 종말론자들은피지로 오세요 당시의 종말을 살아갔던 신약의 저자가 당대에 과거의 종말 예언을 어떻게 석의 해내는지… 이딴 데는 관심도 없고뽀록이날까봐 실력도 없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대목이다.)
이것이 그 미가서 본문이다.
“1 재앙이로다 나여 나는 여름 과일을 딴 후와 포도를 거둔 후 같아서 먹을 포도송이가 없으며 내 마음에 사모하는 처음 익은 무화과가 없도다 2 경건한 자가 세상에서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사람들 가운데 없도다 무리가 다 피를 흘리려고 매복하며 각기 그물로 형제를 잡으려 하고 3 두 손으로 악을 부지런히 행하는도다 그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자기 마음의 욕심을 말하며 그들이 서로 결합하니 4 그들의 가장 선한 자라도 가시 같고 가장 정직한 자라도 찔레 울타리보다 더하도다 그들의 파수꾼들의 날 곧 그들 가운데에 형벌의 날이 임하였으니 이제는 그들이 요란하리로다 5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며 친구를 의지하지 말며 네 품에 누운 여인에게라도 네 입의 문을 지킬지어다
6 아들이 아버지를 멸시하며
딸이 어머니를 대적하며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대적하리니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의 집안 사람이리로다”
―미가서 7:1-6
1. 검과 불: 마태는 이 본문을 다루면서 예수님께서 던지는 사물이 ‘검(儉)’이라고 하였다. 반면 누가는 ‘불’(火)이라고 하였다. 현대적인 역본들은 ‘(검을) 주러 왔다’ 혹은 ‘(불을) 던지러 왔다’ 정도로 가급적 순화시켜 번역하는 경향을 보이지만, 실제 사본들에는 ‘(검을) 던지다’, ‘불을 지르다’는 식의 원색적인 표현들이 그대로 남아있다.칼을 던지면 어떻게 됨? 즉 이 대목은 역사적으로 매우 센 어조의 본문이라는 사실이다. 역사적 예수께서 흐느적흐느적 유약한 사랑만 전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2. 여섯 명인가 다섯 명인가: 미가서 원문이나 마태복음이나 등장인물은 총 여섯 명이다. ‘아들’, ‘아버지’, ‘딸’, ‘어머니’, ‘며느리’, ‘시어머니’. (단, 마태복음에서는 ‘아들’이 ‘사람’으로 바뀌어 있다) 그런데 누가복음에서는 아예 다섯 명이라고 못을 박고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인가? 마태복음에서는 ‘아버지’, ‘딸’, ‘어머니’…가 불특정 개개인에게 적용이 되는 문맥이지만, 누가복음은 아예 ‘다섯 명’을 한 가정으로 못을 박고 있는 것이다. 그 바람에 누가복음의 어머니는 ‘시어머니’도 되었다가 ‘어머니’도 되는 존재가 되었다. 누가는 왜 이들을 ‘한 가족’으로 몰아넣었을까?
3. 셋 대(對) 둘: 위 본문에서 보면 알겠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이들 다섯 명의 순서쌍에 상당한 공을 들이고 있다. “아버지가 아들과, 아들이 아버지와,…” 하는 식으로 반대 역순의 쌍을 꼭 달아주고 있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아버지가 아들에게 대적하고, 아들이 아버지에게 대적하고…’ 하는 식의 호흡으로 열거해서 번역해야 맞는 것이다(ἐπί+속격이 반복된다). 왜 이런 구체적인 순서쌍을 제시했을까? 누가는 이들을 한 가정으로 소개하면서 그 분쟁의 방향성을 “셋이 둘과, 둘이 셋과” 즉, 이 싸움의 양 편대는 3대 2라는 것을 강조한다. 과연 3은 누구고, 2는 누구인가? 어머니가 시어머니도 되는 바람에 당연히 2는 부모님이다. 즉, 이 분쟁은 세대 간의 분쟁이라는 것이다.
4. 디카조와 디아메리조: 검(儉)을 던지는 바람에 생기는 결과를 마태는 디카조(διχάζω)라고 하였고, 불을 지르는 바람에 생기는 결과를 누가는 디아메리조(διαμερίζω)라고 표현하였다. 전자는 막 (여기저기로) 분란이 일어난다는 뜻이고, 후자는 완전히 (두 쪽으로) 갈라진다는 뜻이다.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선 마태복음은 제자가 될 사람들에게 적용하는 본문이라고 보면 별 무리 없다. 사명자 곧, 제자가 될 사람의 경우는 자신의 가족이 원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밥도 안 해놓고 교회가는 아줌마가 배고픈 아저씨를 원수로 여기는거 해당 없 반면 누가복음의 본문은 의외로 일반적인 가정에서 발발하는 보편적인 불화일 수 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피의) 세례를 받은 후에 일어나는 결과다. 즉 예수를 믿고 복음을 영접하면 완전히 갈라서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태복음에서 사명 있는 제자가 되느라 끊어지는 분란의 고충과는 다르게 그 신분이 달라지는 관계를 피력하고 있다. 그러기에 ‘분쟁’이라고 번역된 디아메리조(διαμερίζω)라는 말은 Division 즉, 완전히 갈라지는 사태를 의미한다. 특히 이 갈라짐은 사도행전 2장 3절에 나오는 첫 성령강림 후에 성령이 임했던 현상 곧,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을 표현할 때 쓴 동사이기도 하다. 한 마디로 가정은 예외 없이 성령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불의 혀 같이 갈라져 ‘각 사람 위에’ 있더라고 하지 않던가? 사도행전 성령강림 직후 전개된 역사 자체가 ‘분쟁’이었던 사실을 기억할 것이다. 당연히 사도행전을 쓴 저자는 누가복음을 쓴 동일한 저자다. 이래서 누가의 필치는 독특하고 위대하다는 것이다.
5. 나의 답답함: 이와 같은 가정불화에 임박한 사태를 설명하시면서 예수께서는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의 ‘답답함’(συνέχω)이란 마치 빌립보서 1장 23절에서 바울이 영(의 일)과 육신 사이에 ‘끼어있어’ 자기는 차라리 예수님 곁으로 가버리고 싶다고 토로했을 때, 그 ‘끼어있는’(συνέχω)과 일반이다. 예수님도 답답하고, 불화가 있는 가정에서 가장 지각이 있는 가장도 대개 중간에 끼어있을 것이기에 답답하고.
6. 적용: 그 가정이 선교적인 마인드로 합일체가 되었을 때만 이 가정불화는 성령의 역사로 전환되어 다 소거될 수 있는 것이다. 선교적인 마인드보다는 욕망에 찬 기독교 가정에 불화 잠복해 있지만, 설령 성령의 불이 떨어진 일이 없는데도 불화하지 않는 가정은 역시 욕망이 충족된 가정인 까닭이라 할 수 있다.
* 2016년 8월 14일 성령강림후 열세 번째 주일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 성서일과, 누가복음 12:49-56 (cf. 사 5:1-7; 시 80:1-2, 8-9; 히 11:29-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