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의 ‘주기도문’은 마태와 어떻게 다른가─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주기도문은 마태복음 6장 9-13절에 수록된 기도문입니다. 그러나 이른바 ‘주기도문’ 텍스트는 누가복음에도 보전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이 마태복음의 주기도문과 어떻게 다른 지에 관해 정리한 글입니다. 해석학 이론에 관한 해석 예시이기도 합니다.
주기도문은 부적인가?
언젠가 미국 플로리다 주 펜사콜라 시의회 회의장에서 어떤 자가 사탄을 소환하는 기도를 하자 주변에 있던 크리스천들이 주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고, 그러자 환경이 정리되었다는 전언입니다. 그렇다면 주기도문이란 이처럼 악령을 내쫓는 주술 내지 어떤 주문의 기능을 하는 기도문일까요?
마태복음은 예전(liturgy)으로 쓰기에 더 적합한 정형을 이루고 있지만, 누가복음의 주기도문은 그 기도문의 유래를 밝히는데 주력한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임을 우선 일러둡니다. 이 글에서는 주기도문에 얽힌 그와 같은 맥락에 관해 요약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이 제자에게 가르쳐준 기도 Vs. 주기도문
누가의 주기도문이 갖는 가장 큰 특징은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기도라는 맥락에 있습니다. 마태의 주기도문 역시 기도를 가르치는 맥락에서 모범으로 제시된 기도문이지만, 마태의 그것은 외식하는 기도와의 구별로서 제시되어 있습니다. 기도할 때 외식하면 안 된다는 가르침 속에서 주기도문이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달리 누가복음에서는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제자들이 거론하면서 자신들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구하는 과정에서 주기도문이 제시됩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적어도 세례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마태복음에서 경계했던) 외식하는 당대의 유대교식 기도와는 달랐다는 사실을 먼저 추정할 수 있습니다.
즉 세례 요한이 가르친 기도는 예수님이 가르친 기도와 유대교식 전통의 기도 형식 사이에 끼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세례 요한이 어떤 기도를 가르쳤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다만 유대교 바리새인의 그 외식하는 기도가 어떤 식으로 구현되었는 지는 유추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 내용적으로 송영(doxology)에 국한된 기도였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과 그분의 속성에 대한 찬사가 주된 내용이었을 이 ‘위대한’ 기도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주로 실행되었을 것입니다. 예컨대 찬송가집에 수록된 찬송 중에서 ‘두 번 아멘’ 또는 ‘세 번 아멘’ 등의 찬송이 있습니다. 만일 일 년 열두 달을 그런 찬송만 부른다면 어찌될까요? 찬양이 아닌 것은 아니지만 뭔가 마음에 맺히는 게 없을 것 같습니다.
시편도 다양한 기도의 형식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마음에 맺히는 텍스트들입니다. 하지만 이 시편의 용도가 주로 송영의 기능으로 교사/랍비들의 지도로 어떤 제식화 된 형식으로 사용되었다면 뭔가 마음에 맺히기는 어렵겠지요.
이에 비해 예수님 제자들의 눈에 호의적으로 비쳤다면 세례 요한이 가르쳤다는 기도는 상대적으로 대중의 삶에 아주 밀접한 어떤 내용을 기도에 적용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론은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런 세례 요한의 ‘실질적인’ 기도보다도 한 층 진전된 기도가 바로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였다는 사실에 누가의 ‘주기도문’이 있습니다.
다음은 누가의 주기도문에 얽힌 컨텍스트와 마태복음에서의 컨텍스트를 비교한 차트입니다. 꼭 유의해서 비교해보십시오.
마태의 주기도문 중 상당량이 제거되는 바람에 누가의 주기도문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사실상 ‘일용할 양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시험’과 ‘죄 사함’의 내용도 포함 되어 있지만, 더욱 실생활에 밀접한 문제, 곧 먹는 문제와 맞물려 있다고 하겠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장착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와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에 나타난 거시적인 맥락, 즉 ‘하나님에 대한 기도’와 ‘너에 대한 기도’와 그리고 ‘나에 대한 기도’로써 잡혔던 균형이 누가의 주기도문에서는 하루 일용한 양식으로서 먹거리에 대한 내용으로 압축된 셈입니다.
세례 요한이 가르친 기도, 그리고 당대 유대교의 송영 기도와의 관계를 감안할 때 누가의 본문이 더 원본에 가까운 주기도문 본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태의 주기도문 Vs. 누가의 주기도문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누가복음 11:2-4
누가의 주기도문 컨텍스트는 참으로 창조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짧은 기도문 직후에 등장하는 내러티브와 교훈들은 이 주기도문에 대한 두 가지 보충 설명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째, 기도의 방법입니다.
주기도문 직후에 등장하는 내러티브는 친구에게서 떡 빌리는 이야기입니다. 이야기인즉 얼마나 성가시게 구하였던지 친구라서 떡을 받을 수 있었던 게 아니라 성가시게 함으로써 떡을 받게 되었다는 전언입니다. 즉 응답을 받으려면 그 정도는 들들-볶아야 한다는 것일까요? 이 내러티브 다음에는 마태복음과도 평행한 저 유명한 기도의 강령,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가 배치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강령이 마치 친구를 성가시게 한 그 내러티브의 귀결인 것만 같습니다.
둘째, 기도의 내용입니다.
누가의 주기도문 맥락에서 또한 특징적인 것은 그 기도가 어떤 내용을 기도의 제목으로 내놓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앞서 언급한 일.용.할. 양.식.의 그 구체적 내용물과 관련된 이야기가 잇달아 나오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란 바로 ‘생선과 알’입니다. 그러니까 이 주기도문에서의 ‘일용한 양식’은 완전히 상반된 상징 세트로 묶여 있습니다. 생선은 뱀, 알은 전갈과 함께.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떡(돌)과 생선(뱀)’으로 묶여 있던 것이 누가복음에 와서는 ‘생선과 알’로 구성되었다는 사실이다. 사본 작업상 이에 대한 혼동이 있었던지, 누가복음 사본 중에는 아예 ‘떡(돌), 생선(뱀), 알(전갈)’, 이렇게 세 개의 세트로 나오는 사본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에서의 ‘떡과 생선’이 누가복음에 와서는 ‘생선과 알’로 변경된 것으로 이해함이 타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서 ‘떡’은 그 앞선 내러티브, 즉 친구에게 꾸어오는 양식으로 이미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에서 ‘떡과 생선’세트였던 것을 누가는 ‘떡’을 위의 친구 내러티브로 올려버리고, 그러고서 남겨진 ‘생선’은 다른 상징인 ‘알’과 묶어낸 것입니다.
자 그렇다면 떡은 떡이요, 생선은 생선이라면, 대체 ‘알–전갈’ 세트는 어디서 튀어나온 상징일까요? 누가가 대충 골라잡은 것일까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선 ‘떡과 생선’은 유대교 사회에서 전통적이면서도 유서 깊은 상징입니다. 떡은 이미 출애굽 광야 시절에 (하늘의) 신성한 양식의 전형이며(만나), 생선은 그 광야 노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불평하는 과정에 그리워 하던 이집트식 먹거리입니다. 실상 메추라기로 대체되었지만, 훗날 전승에서는 일상 속의 손쉬운 재료인 ‘생선’이 떡과 함께 유서 깊은 일용한 양식의 질료로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수많은 식재료 가운데서 ‘오병이어’(다섯개의 떡과 생선 두 마리)가 된 전거입니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 없이 생선과 외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민수기 11:5
그렇다면 대체 ‘알’은 무엇일까요?
돌, 뱀, 전갈
‘떡, 생선, 알’과 함께 묶음이 된 부정의 세트 ‘돌, 뱀, 전갈’에 대한 우선적인 관찰이 있습니다. 돌은 당대에 떡을 굽는 과정에서 떡과 혼동하기 쉬운 사물이었습니다. 다소 비약적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당장에 이해를 돕기 위해 아래 사진을 한 번 보십시오.
외형상 흡사 돌이 떡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저 돌을 떡이라고 하면서 아들에게 주는 아버지가 어디에 있겠냐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뱀은 아마도 물뱀을 말합니다. 물고기 잡는 중에 자칫 뱀이 걸려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고기와 뱀은 필경 모양은 다르지만, 만일 물가에서 물고기와 뱀을 손으로 만져본다면 느낌이 비슷했을 것입니다(상징학에서는 물고기와 뱀이 유사합니다). 하지만 촉감은 유사하겠으나 물고기가 아니고 뱀인 것을 육안으로 보게 된다면 얼마나 놀랄까요? 그런 것을 아들에게 주는 아버지는 없다는 것입니다.
끝으로 알과 전갈입니다.
광야에 서식하는 흰색 전갈은 알과 헷갈린다고 합니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는 혼동할 수도 있겠지만, 누가가 새롭게 차용한 이 알-전갈에는 다음과 같은 메타포가 들어 있습니다.
6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누가복음 13:6-9
7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8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9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
상기 누가의 본문에서 보면 ‘거름’이라는 용어가 보입니다. 직역하면 한 마디로 ‘똥’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κόπριον(코프리온)이라고 읽습니다. 그것은 마치 전갈, 즉 σκορπίον(스코르피온)의 음가와 유사했던 것입니다.
떡을 꾸는 자와 꾸어준 자
돌, 뱀, 배설물(전갈), 이것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결코 주시지 않겠다는 식료의 목록이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이 목록은 우리의 주된 기도의 제목들이었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누가 돌덩어리를 구하고 찾고자 두드리겠습니까? 우리의 기도 목록에 들어 있던 돌덩어리는 아마도 황금 덩어리였을 것입니다.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가라사대 그것은 먹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씀이십니다.
또 우리 중에 과연 뱀을 달라고 기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아마도 황금을 손에 쥘 수 있는 뱀의 지식을 구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황금을 만드는 기술(연금술)을 개발하다가 궁극적으로 얻게 된 금속이 철이었고, 마치 뱀이 자기 꼬리를 무는 형상인 그 시간의 퇴행은(금->동->철) 황금은 만들 수 없었지만 황금만능주의 시대를 열었을 것입니다. 그 강한 철로 황금을 빼앗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먹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고 알(ᾠόν)은 씨앗입니다. 삶은 계란이나 계란 프라이가 아니라, 씨앗입니다. 씨앗은 다음 세대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생물의 몸에서 나오는) 알/씨앗보다는 거기서 쏟아지는 배설물(κόπριον/ σκορπίον, 스코르피온)이나 구하고 있었기에 하늘의 아버지는 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도의 내용 곧 엄선된 기도의 제목들이 중요한데, 최종적으로 누가의 주기도문 컨텍스트는 응답 받을 수 있는 그 방도로서 기도에 다시금 집중케 한다는 사실입니다.
앞서 떡을 구하던 방도는 친구에게 강권하여 취하는 방법이라고 오인할 법하나, 우리는 이 내러티브 속에서 그 떡 구하는 방도가 다름 아닌 주기도문과 묶여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합니다.
이 내러티브(친구를 조르는)에서는 결론적으로 과연 ‘나’가 누구인지가 그 적용의 최종 관건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달라’(내놓으라)는 태도에 익숙한 나머지 친구 집에 들어가서 강권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을 ‘나’로 상정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더 세게 찾고 두드려야 한다는 식입니다.
하지만, 누가와 마태에게서 공히 포착되는 이 주기도문의 특징은 ‘죄’를 ‘빚’과 동의어로 보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보다 마태복음이 더 심화되어 있습니다(이는 마태의 신학입니다). 상기 차트에서 발췌했던 마태복음 6장 12절 대목을 직역하면,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자(ὀφειλέταις)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빚(ὀφειλήματα)을 사하여 주시옵고
마태복음 6:12
ㅡ가 됩니다.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빚진 자를…’입니다. 죄는 곧 ‘빚’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죄를 사함 받아야 되겠는데, 그것은 일종의 내가 가진 채권으로서의 빚(죄)을 남에게서 탕감해줄 때에 하나님께도 용서를(빚을 탕감) 받을 수 있는 원리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구조와 원리가 마태에게서는 특유의 ‘빚’에 관한 워딩으로 구현되었다면, 여기 누가복음에서는 친구 내러티브로 숨쉬고 있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즉, 우리는 잠들려는 친구에게 찾아가 떡을 달라고 떼를 쓰는 그 사람이 아니라, 그렇게 떼를 쓰는 친구에게 떡을 빌려주었던 바로 그 친구였던 것입니다.
그 때에 떼를 쓰며 떡을 빌려갔던 친구의 빚/죄를 사하여 줄 때에 비로소 하늘에 계신 아버지는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 떡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가만이 구사할 수 있는 창조적인 재구성이지만 누가 특유의 이른바 경제신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론으로서 신학일 뿐 아니라 실제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세계에 일용할 양식을 순환시키는 중대한 법칙이기도 하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의 원리라고나 할까.
성령강림후 10주 | 좋은 것을 자식에게 | 누가복음 11:1-13. (cf. 호 1:2-10; 시 85; 골 2:6-15; 눅 11: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