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살아생전에 평생을 정체성에 시달렸다.
그가 과연 사도인가? 라는 문제인데 자고로 사도라 함은 두 가지 요건 즉, 실존 예수의 목격자이면서 그분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실이 있어야 하는데 그에게는 베드로나 주의 형제 야고보 같은 이렇다 할 증거가 없었던 것이다.
이 사도성(apostleship)문제는 복음 전도 때 겪는 일반적인 장벽과는 별개로, 그가 전하는 복음의 정통성 문제로 비화되기 일쑤였다. (바울 자신은 자기가 전하는 외의 복음을 ‘다른 복음’이라고 불렀지만 다른 복음 입장에서는 그의 복음이 ‘다른 복음’이었기 때문이다.)
좀 엉뚱하지만 이런 상상을 해봄직하다. 왜 바울은 네 개의 복음서에 어떠한 형태로든 등장하지 않는 것일까?
결과적으로는 기독교 형성사에 그 어떤 사도(군) 보다 막대한 영향을 끼친 바울임을 감안하면 하다 못해 예수님 일대기 막간의 악역으로라도 심어 놓음직하지 않을까? (구레뇨 시몬을 보라)
네 복음서는 바울과 철저하게 단절된 구도로 일관한다. 그의 타이프라이터였다는 마가조차도, 그의 선교 동행이었던 누가조차도. (행전에서만 도식적인 할당이 있다)
베드로와 실존 예수와의 관계는 그 누구도 의심치 않았음이 네 복음서에 나타나 있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비록 네 복음서에 이름은 등장하지는 않지만 불편한 친족들로 등장하고 있고, 친족관계는 이미 그가 지닌 사도성의 크레딧이다.
상대적인 바울과 복음서 간의 이 같은 단절성은 바울 자신의 역사적 진술인 다음 구절에서도 일치한다.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
…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갈라디아서 1:11-17
과연 그는 사도군과만의 단절인가?
아예 예수 자체와의 단절인가?
예수의 행적 동안 그는 어디가서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그는 어느 날 갑자기 교회의 박해자로 혜성과 같이 나타났나ㅡ
이는 연대기의 유격에서 오는 단절성이라기보다는 그의 복음에 대한 단절성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는 것이다.
한 마디로 다른 복음이 그를 소외시키고 있다.
이와 같은 사도성에 관한 정체성 문제를 그는 오로지 계시성 하나를 통해 극복했다.
12절에 피력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그렇다면 계시 곧, 바울이 받았다는 그 아포칼립시스/계시란 무엇인가?
제 3명사 변화 속격으로 표현된
이 ἀποκαλύψ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은 두 가지로 번역이 가능하다.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일이 불러주시는 복음을 받아(쓰기 했)다는 뉘앙스로서 아포칼립시스. [주격 속격]
2)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내심(현현) 그 자체로서 ‘아포칼립시스’. [목적격 속격]
우리 말 본문에서는 바울이 이르기를 자신의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라고 함으로써, 그래서 그것은 마치 예수께서 (신비롭게 나타나셔서 복음을) 일일이 가르치셨을 것으로 연상되게 표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계시의 의미는 후자로 읽는 것이 타당하다.
즉,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는 ‘아포칼립시스’를 대면함을 표현한 말이다.
그 충격파/파장은 일시에/일순간에 바울 자신이 해야 할 일, 전해야 할 복음을 알게 했다. 이것이 바울이 받은 계시 ‘아포칼립시스’의 참된 의미로서, ‘알.아.져. 버.린. 것’, 그러니까 한마디로 ‘폭로’였던 것이다.
이 아포칼립시스의 강타를 어떻게 쉽게 설명할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지난 주간에 우리는 서울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고치다가 죽음 당한 한 청년의 사고를 접했다. 그의 배낭에서 공구들과 함께 목격된 소지품들, 특히 ‘컵라면’ 따위는 그만 전국을 강타하고 말았다. 그가 살다 간 삶의 자리가 전국을 뒤흔들어 놓고 만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폭로(아포칼립시스)라고 부른다.
누가는 바울에게 있어서 그 폭로가 얼마나 강렬했던지 눈이 멀었다고 했다. 빛에.
새로운 눈을 갖게 된 것이다.
그 빛(새로운 시각)이 그의 행로를 완전히 뒤바꿔 놓았다. (그 길은 이방인의 빛이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닌 것일 수밖에.
비록 먼저 된 사도들이나 예루살렘의 적극적 후원은 없었지만 성령이 전적으로 걸어젖힌 드라이브에 힘입어 그의 복음은 최후의 승리자가 되었다.
이 시대에 가장 비참한 복음 전도자는 보냄을 받은 사실도, 계시를 받은 사실도 없이, 스스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 2016년 6월 5일 성령강림후 3주 |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아 | 갈라디아서 1:11-24. (cf. 왕상 17:8~16; 시 146; 갈 1:11~24; 눅 7:1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