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간에 기독교인의 타락을 알리는 잦은 소식으로 공연히 ‘칭의’의 교리가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구원이란 중생과 변화를 수반하기 마련인데 구원 받은 자가 어찌 저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구원의 진리인 칭의는 구원된 신분을 표지하는 정의이지, 그 개개인의 윤리를 표시하는 지표가 아닙니다. 칭의(δικαίωσις, 동사 δικαιόω /의롭다고 하다)라는 단어는 본래 바울이 하나님께서 예수님 믿는 사람들에게 이루신 결과를 표현하기 위해 들여온 용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바울이 혼자서 창작한 용어가 아니라 신명기 25장 1절에 근거한 어떤 명제에 기인하는 용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시비가 생겨 재판을 청하면 재판장은 그들을 재판하여 의인은 의롭다 하고 악인은 정죄할 것이며 ―신명기 25:1
ἐὰν δὲ γένηται ἀντιλογία ἀνὰ μέσον ἀνθρώπων καὶ προσέλθωσιν εἰς κρίσιν καὶ κρίνωσιν καὶ δικαιώσωσιν τὸν δίκαιον καὶ καταγνῶσιν τοῦ ἀσεβοῦς
여기서 중요한 것이 “의롭다 하다”, 즉 재판장이 선언하는 말입니다.
여타의 종교는 “살려달라”고 구원을 요청하는 자의 필요에 의해, 그 필요한 건건에 따라 신과 교섭을 하는 형태를 이루지만 ― 그래서 1000만원 짜리 굿도 가능한 것 ― 기독교는 어느 시점에 어느 문제로 하나님을 찾아오든 그 구원을 요청하는 자의 본질을 소급하는 구조입니다.
의(義)가 있느냐―를 들여다 보는 구조, 이것이 기본 세팅입니다.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실지언정 이 구조(신명기 25장 1절)에 근거해 판정하시는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의 전적인 은택으로 “의롭다 하다” 라는 판정을 이끌어낸다는 것인데, 문제는 앞서 언급한 대로 실제로는 ‘의롭게 되지’도 않은 사람이 단지 “의롭다 하다”는 선언만으로 과연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이 구원의 교리에 동의 하십니까? 공정합니까?
기독교인의 자가당착은 아닙니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예시를 통해 그 ‘칭의’, 곧 기독교 구원의 진리가 잘 설명될 수 있습니다. 독립군 이야기입니다.
혹시 파락호로 불린 김용환이라는 독립군을 아십니까?
파락호(破落戶)는 양반 자손이 물려 받은 재산을 몽땅 말아먹을 때 부르는 말인데, 이 분이 그런 분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는 노름에 빠져 살았다고 합니다. 안동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노름판에는 그가 꼭 낄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렇게 노름으로 잃은 재산만 전답 18만평에 달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무남독녀 외동딸이 친정에 가서 장농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받은 돈까지 노름으로 탕진했다고 합니다. 시댁에 빈 손으로 갈 수밖에 없던 딸은 물론이고 문중 사람, 세상 사람이 다 손가락질하던 김용환은 해방이 된 다음 해인 1946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이 같은 파락호/노름꾼인 김용환이 다름 아닌 만주에 독립자금을 댄 독립투사였음이 밝혀진 것은 사후의 일이었다고 합니다. 일제의 눈을 피해 파락호 행세를 하며 그 돈을 몽땅 독립군 군자금으로 보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때 그 따님의 신분입니다.
그 따님이 파락호의 딸 신분에서 일시에 독립투사의 딸 신분이 된 것은 전적으로 그 김용환 선생의 신실함(πíστiς) 덕택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우리가 “예수님의 믿음으로”(πíστiς Xρiστoȗ) 라는 말을 떠올릴 수 있겠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전적인 공로인데 우리는 그의 안에(in Christ) 있음으로 인해 비로소 “의롭다 하다”(δικαιόω) 선언 받는 원리입니다. 이 신분의 상태와 결과는 그 따님의 현 직업, 도덕과 윤리와는 아무 관련이 없이 판정을 받는 선언인 것입니다.
카톨릭에서는 이 칭의가 사람을 실.제.로. 변화시킴으로써 ‘올바르게 만든다’(to justify)고 봤던 것에 혼란이 야기되었고, 그래서 개신교회는 이를 타개하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를 ‘단지’ 옳다고 선언하시는 것이라고 개정을 하긴 했는데, 여기서 ‘단지 (옳다고)’가 결과적으로 그만 “저.절.로. 변화”한 것처럼 오용되고 말았지만(오늘날은 ‘유보적 칭의’라는 이상한 말까지), 이들의 공통 문제는 실천의 문제지 위에서 정의된 칭의의 완전무결한 신분 문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것입니다.
현재 거렁뱅이라고 해서 독립군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변화가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다 인간성들이 행위를 따라주질 않아 발생된 해석의 변질들일 뿐인 것입니다.
에필로그.
후일에(1995년) 독립군 후손으로서 건국훈장이 추서된 그 김용환 선생 따님께서 이런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그럭저럭 나이 차서 십육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문에 혼인은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 시댁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다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날 늦추다가
큰어매 쓰던 헌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붙어 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고.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군 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댁에서 보낸 농값 그것마저 다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한대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성경에서는 이와 같은 진실을 밝히는 일을 성령께서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불과 16살에 시집가는 딸 아이로서는 말해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요 16:12-15).
저런 시(詩)를 지어 주님께 기도로 올릴 때 우리는 비로소 명실상부 그리스도인의 신분으로 성화(sanctification)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 2016년 5월 22일 성령강림후 1주 | 의롭다 하심으로 | 로마서 5:1-5. (cf. 잠 8:1~4, 22~31; 시 8; 롬 5:1~5; 요 16: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