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9장 무지개에 대한 오해
상징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인을 곤란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분들의 단골 질문 중 하나가 바로 무지개(와 홍수)의 상징에 관한 질의이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다.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다시는 물로 멸하지 않는다고 했으면서, 그 표식이 무지개라면서 어찌하여 여전히 홍수가 발생하느냐는 것이다.
이런 질문에는 흔히 ‘지구 전체의 (대) 홍수가 없을 것이라 했지 홍수 자체가 아예 없어진 건 아니다.’ 라고 응수하지만 좋은 답변은 아니다.
그런가 하면 평화의 표식인 이 무지개가 현대에는 동성애자의 다양한 성행위 방식의 정당성에 점용 되고 있다. 심지어 이들을 이용해 유명세를 얻으려는 목사들 중에는 무지개 스톨을 차고 나가 무지개떡으로 성찬을 집례하는 인간들도 있다.
모두 상징에 대한 무지와 오남용에서 비롯된 의역의 이단(the heresy of paraphrase)이다.
상징은 그렇게 작위적이면서 자의적 해석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9장 무지개에 관한 베드로의 관조
노아 시대에서 예수 시대를 거쳐 그 후예들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무지개 도상에 관해 가장 모범적으로 해석한 인물은 베드로일 것이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벧전 3:21)
홍수를 —-> 세례로
회개를 <—- 무지개로 제식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세기 9장 무지개에 관한 세례 요한의 관조
세례 요한이 예수에게 세례를 베풀었을 때의 도상을 전통적으로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상징으로 표명하는데 여기서 비둘기는 순한 동물성 자체에 의존한 상징이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수장한 홍수를 종결시킨 바람(루아흐)에 상응하는 상징성으로 임한다.
종결된 홍수 재앙 속에서 비둘기가 성령의 기호가 되기까지
물은 —> 구름으로,
바람은 <—- 구름과 구름 사이의 무지개로서 한마디로 시각화된 루아흐였던 셈이다.
그러나 무지개 케쉐트(קשׁת)는 엄밀한 의미에서 무지개(rainbow)라기보다는 활(bow)이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무기인 것이다. 예언자 엘리사는 죽을 때가 가까왔을 때 왕 요아스에게 활을 쥐어 주면서 안녕을 약속했다. 또한 하나님이 노아에게 안녕을 약속했을 때 1인칭 대명사를 붙여 카쉬티(קַשְׁתִּי), 즉 “내 활”(my bow)로 언약한 것이다.
종결
그러므로 이 무기는 마치 에덴 동산에서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를 생명나무로부터 보호했던 화염검(불칼)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다.
상징 작법의 대가인 누가(Luke)는 이 물 위를 운항하는 바람과 비둘기를 통합적인 기호로 이해했는데, 다음과 같은 놀라운 표현을 쓴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을 받고…” 다시는 물로 멸하지 않는다고 한 대신에, 이제 불의 심판이 임한 것이다.
노아의 방주 위의 무지개가 —> 주님 머리 위의 비둘기로,
주님 머리 위의 비둘기가 이제는 —> 불의 혀(화염검, 불칼)로 이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