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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년생인 문익환 목사는 40대 중반에 디트리히 본회퍼의 ‘거마인저머 레벤’(Gemeinsame Leben)이라는 책을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그 번역 후기가 좀 황당하여 옮겨 본다.

(※ 1964년 초판본이라 표현들은 참작할 것)

Gemeinsames Leben by Dietrich Bonhoeffer

“디이트리히 본회퍼, 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1906년 2월 4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 1945년 4월 9일 플로센부르그에서 죽다.”

(본회퍼의 비문)

디이트리히 본회퍼. 그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살고 죽었다. ‘모든 형제를 그리스도로’ 알고 사귀라고 그렇게 간곡히 권면하더니. 우리는 그에게서 한 민족의 고민, 아니 전 세계의 고민을 지고 죽은 그리스도를 만난다. 그리고 그의 이름이 우리의 고막을 울릴 때마다 우리의 가슴은 뭉클하게 뜨거워진다.

그는 바르트나 불트만 이후의 신학계를 영도할 대신학자가 되어 세계 그리스도교의 빛난 새벽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존 베일리가 바르트 이후의 신학으로 불트만의 신학, 틸릭의 신학과 함께 본회퍼의 신학을 든 데 대해서(기독교사상 제1권, 199면 참조) 이의를 제기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의 신학이 새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는 것이었다는 점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동독의 공산주의자들이 그의 소위 ‘비 종교적인 그리스도교 해석’을 들고 나와 독일의 그리스도교를 자기들 편으로 끌려고 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우리는 그의 영향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미국에서도 일급 신학자들을 동원해서 본회퍼의 신학의 위치를 비판적으로 측정해 보려고 1962년에 ‘본회퍼의 위치’(the Place of Bonhoeffer)라는 논문집을 내기에 이른 것이다. 그의 신학의 영향을 받지 않은 영역은 거의 없다. 에큐메니칼 운동, 그리고 세속 사회와의 진지한 대화를 시도하는 Evangelische Akademie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그는 대신학자, 대지도자가 된다는 너무나 속된 명예심에 좌우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순교자가 된다는 공명심 같은 것도 없었다. 그것은 그가 무서운 투쟁에 휘말려 들어가는 독일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을 떠나 미국에 잠깐 와 있는 동안(이것은 그의 두 번째의 미국 방문이다) 남긴 그의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나는 왜 여기 와 있는지 모른다… 독일의 형제들을 생각하고 잠깐 기도를 드리는 것만으로 나는 압도되고 만다…전쟁이 나면 나는 미국에 머무르지 않는다.”

미국 친지들의 손을 뿌리치고 급박한 전운이 감도는 고국을 향해 1939년 7월 7일 뉴우 요오크를 떠나 대서양을 건너면서 그는 이런 말을 쓰고 있다.

“배에 오른 이후로 장래에 대한 나의 내면적인 분열이 사라졌다.”

라인홀드 니이버가 그를 유니온 신학교에 초청한 목적은 신학자로서의 그의 소질이 아까와서 그를 독일의 소용돌이에서 빼 내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의 절친한 친구인 포올 레에만 교수는 그를 미국에 붙잡아 두려고 무척 애써 설득해 보았으나 그것도 허사였다. 그에게는 히틀러의 철권 아래서 희생될 동족이 그저 안타깝게 귀했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고민에서 다만 몸을 뺄 수 없었던 것이다. 독일로 돌아가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와 함께 십자가의 고난을 겪는 길을 피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참으로 단순하고도 당연한 이유였던 것이다.

그는 니이버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몸서리나는 이자택일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 문명이 살아 남기 위해서 조국의 패전을 바라든가, 자기들의 나라가 이기기를 바라서 우리의 문명을 파괴하든가 둘 중의 하나입니다. 내가 둘 중의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할 것이냐는 것을 나는 압니다. 그러나 나는 안전한 가운데서 그런 선택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그렇게도 사랑하는 조국이 망할 것을 하나님 때문에 원하여 민족 반역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예레미야의 후배인 것이다. 생명을 내걸고 조국을 사랑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하나님을 위해서 조국을 무너뜨리려고 생명을 내던져 투쟁한다는 것은 참으로 있기 어려운 일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피할 수 없는 그의 신앙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히틀러 암살 음모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결국 그는 자기가 암살하려던 히틀러의 수하 히믈러의 특별 명령으로 1945년 4월 9일 이른 새벽에 교수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와 함께 마지막 몇 주간을 함께 지낸 한 영국인 장교는 그의 마지막을 이렇게 전해 준다.

“본회퍼는 언제나 아무 것도 아닌 일로 행복과 기쁨을 퍼뜨리는 것 같았고, 그는 살아 있다는 단순한 사실 때문에 깊이 감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같았다… 그이만큼 하나님이 생생하게 언제나 몸 가까이 계시는 것을 느끼는 사람을 나는 별로 만나보지 못했다… 1945년 4월 8일 일요일, 본회퍼 목사는 간소한 예배를 인도했고, 우리 모두의 심금을 울리는 말씀을 해 주었다. 그는 감옥살이하는 우리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할 수 있었고 거기서 도달한 생각과 결과를 바로 표현할 수 있었다. 그가 마지막 기도를 마치자 평복 차림을 한 사람 둘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불렀다. ‘죄수 본회퍼, 따라오라.’ 그것은 우리 죄수들에게는 한 가지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교수대였다. 우리는 그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그는 나를 붙잡고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죠. 그러나 나에게는 생의 시작입니다.’고 하는 것이다. 다음 날 그는 플로센부르그에서 죽었다.”

내가 본회퍼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 물론 그의 신학 때문이 아니고 그의 이 같은 생애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우리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그렇게도 뜨겁게 동족을 사랑하고 그렇게도 투철하게 신앙으로 살아간 그의 모습이 나의 뜨거운 관심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어느덧 나는 그의 신학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저서들을 틈틈이 읽어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신학에 커다란 공감을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관심이 그의 저서 Gemeinsames Leben(1938)의 번역이라는 뜻하지 않은 결실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것이 한국어로 옮겨지는 그의 첫 저서라는 점에서 나는 무거운 책임과 함께 어떤 감격에 찬 흥분 같은 것을 느끼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의 저서들이 계속 번역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한 바 있다.

나는 이제 이 책에 대해서, 그리고 번역에 대해서 몇 마디 해야 할 의무를 느낀다.

나는 이 책 번역에 있어서 처음에는 ‘…이다’ 식의 문장으로 옮겨 보았다. 그런데 차츰 그 내용이 너무나 간곡한 권면이라고 느끼게 되면서, 나는 이것을 편지체로 옮기고 싶어졌다. 그래서 문장을 ‘…입니다.’로 고치기에 이르런던 것이다. 자신의 깊은 신앙 체험에서 신앙과 생활에 관한 구체적인 권면을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성도들에게 뜨거운 마음으로 써 보냈던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사도 바울의 서간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과 똑같은 마음의 뜨거움을 느끼면서 읽고 또 읽었다. 사실 이 책은 핑켄발데에 있는 지하 신학교의 학생들과의 공동 생활의 결실이요, 그들을 통해서 전 세계 교회를 향해서 주는 극히 구체적인 간곡한 권면의 말씀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은 평범한 도덕적인 권장의 책일 수는 없다. 또는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와 같은, 그리스도교의 경전을 권장한 책과도 같지 않다. 그는 이 책에 토마스 아 켐피스의 저 유명한 책에서 두 번이나 인용한다. 그래서 많은 도서관은 이 책을 경건 문헌에다 정리해 넣을 것이다. 그런데 본회퍼 자신은 경건 자체를 철저히 배격한다. 경건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 받은 죄인이 되는 것만이 그리스도인의 사귐을 이룩하고 지탱해 나간다고 생각한다. 경건한 행위로써 죄를 고백하는 것은 가장 가증스러운 마음의 음란이요, 음탕한 지껄임이요, 악마의 꾐이라고 극언을 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종교성에 대해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는 바르트의 강한 영향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그는 바르트의 강의를 직접 들은 일은 없었으나, 본에서 바르트의 세미나에 참가한 일이 었었는데, 그 때 그는 “하나님께는 죄인의 저주가 경건한 사람들의 할렐루야보다 더 즐겁게 들릴 것이다”는 루터의 말을 던져서 바르트의 주의를 끌었고, 이것을 계기로 서로 의기가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 후기의 그의 ‘비종교적인 그리스도교 해석’의 싹이 튼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자신도 놀랄 만한 신학적인 새 출발이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곳세이의 말대로, 그것은 과거와의 단절이 아니고 ‘같은 것의 대담한 완성’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Godsey: the Theology of Dietrich Bonhoeffer, 1960, 264). 그러나 그의 ‘비종교적인 그리스도교 해석’은 그의 관심의 초점이 교회에서 세속 세계로 옮겨진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교회의 주로서의 그리스도가 세계의 주로서 넓은 차원에서 이해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그의 관심의 초점이 교회에서 세계로 옮아 간 뚜렷한 자취를 우리는 이 작은 책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그의 유명한 ‘제자의 길’(Nachfolge, 영역으로는 the Cost of Discipleship)과 그의 마지막 유고 ‘옥중 서신’ 사이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인다. ‘제자의 길’에서 그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은 세상에서 교회로 움직이는 움직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옥중 서신’에서 강조된 ‘비종교적인 그리스도교’는 교회에서 세상으로 향한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책은 세속 세계 속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귐의 가능성과 의미를 찾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책 서두에서 벌써 그리스도인은 세속 세계 속에 뿌려진 씨라는 것을 말한다. 말씀 아래서 성립되고 생명을 보존하고 움직이며 사명을 다하는 사귐으로서의 교회를 새로 발견한 것이라고 하겠다. 교회를 사귐으로 이해한다는 것이 이미 비종교적이요 세속적인 이해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그가 이 책을 쓸 그 당시의 그의 관심의 초점은 아직도 교회였던 것이다. Franklin H. Littel은 ‘본회퍼의 역사, 교회, 세계’라는 논문(the Place of Bonhoeffer에 실린 논문)에서 본회퍼와 이 책의 위치를 대강 이렇게 말한다. 20세기에 접어 들면서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은 먼저 성서를 다시 찾았고, 다음에 교회, 그 다음에 평신도를 다시 찾았다고 한다. 칼 바르트의 ‘로마서 강해’가 그 첫 단계를 상징한다면, 본회퍼의 이 책은 제2 단계를 금 긋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가 죽은 후,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 ‘평신고 연구원’(Evangelische Akademie)의 태동과 함께 제3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p. 28). 물론 그의 박사 논문 ‘성도의 사귐’이 이미 그의 관심의 소재를 보여 주고도 남음이 있다. 그렇지만 본회퍼는 그 문제를 교회 전체가 본격적으로 함께 다루지 않으면 안 될 문제로서 새삼스레 이 책에서 제기하려고 한다고 머리말에서 잘라 말한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는 ‘사귐으로서 존재하는 그리스도’였다. 바르트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본회퍼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는 성도의 사귐 속에서 실재로 체험되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 사귐은 세상에 뿌려진 씨들의 사귐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의미에서 그의 교회론은 그의 그리스도론의 다른 한 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교회론은 구체적인 그리스도론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역시 그는 바르트의 신학을 들러가지 않고 통과한 사람이어서 그의 신학은 철두철미 그리스도론적이다. 그래서 예일 대학의 Jaroslav Pelikan 교수는 그의 신학이 거의 그리스도 단일론적인(Christomonistic)데 이르러 있다고 할 정도였다(Bonhoeffer’s Christology, 1933, the Place of Bonhoeffer, 145ff). Gerahrd Ebeling교수 같은 분은 그의 ‘비종교적인 해석’은 곧 그의 ‘그리스도론적인 해석’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의 그리스도론적인 관심은 그의 생애가 끝나 갈 무렵에 점점 더 강해졌던 것 같다. 그는 1944년 4월 30일 옥중에서 친구 Bethge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당신은 나의 신학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 형성되어 가느냐 하는 것을 알면 놀랄 것입니다. 아마도 어리둥절할 것입니다…나에게 줄곧 되돌아오는 것은 그리스도교는 무엇인가, 오늘 우리를 위해서 진정 그리스도는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가 영원히 새로운 그리스도론을 새로운 각도에서 전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갔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후광처럼 빛나는 생각 하나를 발견할 수 있는 것 같다. 그가 이 책에서 그다지 강조하지 않으면서도 당연한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사귐은 섬김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차츰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그리스도로 그를 압도해 온 것이 아닐까? 그의 마지막 설교의 본문이 “그는 매를 맞아 우리의 병을 낫게 해 주셨다”는 이사야 53장의 고난의 종의 귀절이었다는 것은 그것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요는 고난의 종으로서의 그리스도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이 자신도 놀라고 그의 친구 Bethge도 놀랄 정도의 것이 아니었을까?

마지막으로 그의 신학은 결코 사색의 산물이 아니고, 그의 신앙 체험을 걸터들인 데서 생겨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 작은 책에서 역력히 볼 수 있다. 이 책은 신학서가 아니고 신앙의 책이다. 그리고 철저하게 신앙의 책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책이 되었다고 하겠다. 신학의 본연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나는 이 책에서 큰 교훈을 받는다.

이 이상 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것이 졸겠다. 한국의 독자들이 그의 저서에서 직접 그를 만나는 것, 이상 옮긴이의 바람이 있을 것인가?

이 번역은 뮌헨의 카이젤 출판사에서 발행한 제9판 (1958)에서 직접 옮긴 것이다. 단 내용 구문은 John W. Doberstein의 영역 Life Together (Harper & Brothers, 1954)를 따랐다. 물론 뜻을 해명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이 영역에서 받았다는 것을 말해 둔다.

1964년 5월 11일 수유리에서
문익환

이 역자 서문을 통해 본회퍼라는 급진적 실천가의 사상이 우리 사회에 유포된 동기를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역자는 본회퍼의 1) ‘비종교적인 그리스도 해석’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이는 비(非) ‘종교적’이라는 말로 완화되었지만 사실상 ‘비 기독교적 그리스도’의 다름 아니다. 말 그대로 그리스도를 비 기독교적으로 적용하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민중신학의 동기이기도 하다. 2) 경건을 배격하는데 매력을 느끼고 있다. 경건 행위로 죄 고백하는 일을 음탕한 지껄임이요 악마의 꾐이라는 주장에 모종의 쾌를 체험한 것으로까지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당대 기독교 내에서 주류로 통했던 전통 교회의 산 기도, 새벽 기도, 부흥회 따위를 저열한 행위로 여기고 자신들의 사회주의 운동을 더 우월한 경건 행위로 규정하려는 동기였을 것이다. 3) 본회퍼의 급진적인 행동과 죽음에 애써 자기 동기화하는 시도에 매료됨이 엿보인다. 역서의 가장 앞면에 원저자의 서문보다도 앞에 자신의 번역 후기─ 이 길고도 긴 ─를 위치시키는 역자가 세상에 어디 있는가? 타인의 순교에 숟가락을 얹으려는 시도가 아닌 한.

여기에서 황당한 것은 이것이다. 역자는 독일어 원서를 직접 옮겼다고 말미에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렇게 덧붙인다. “영역 Life Together (Harper & Brothers, 1954)를 따랐다. 물론 뜻을 해명하는 데도 많은 도움을 이 영역에서 받았다.” 독일어 원서를 옮겼다는 것인가 영역을 옮겼다는 것인가. 참고로 역자는 프린스턴대학교 출신이다.

이렇게 본회퍼가 우리 사회에 유포되기 시작하였다.
글을 닫으려고 보니 아래 사진이 떠오른다.

1989년 3월 25일 김일성과 문익환 목사

“히틀러의 철권 아래서 희생될 동족이 그저 안타깝게 귀했다”, “내가 본회퍼에게 흥미를 느끼기 시작한 것은…너무나도 우리와 같은 어려움 속에서 그렇게도 뜨겁게 동족을 사랑하고…”라며 자신을 본회퍼에 빗댄 양반이 한반도의 히틀러와 저토록 즐겁게 만나다니… 이분의 이중적 멘탈은 다시 봐도 이해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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