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코로나 시대, 유명 방송설교가들의 허위 성례전

코로나 시국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오래 가고 있다. 백신 접종률에 따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전문가 견해도 상반된다. 어떤 전문가는 코로나 시국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도 하고, 어떤 전문가는 변종 바이러스 추이에 따라 만성 전염병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고도 말한다. 이 글은 설령 우리가 과거의 일상으로 회귀한다 하더라도 코로나 시국 방역 정책에 반응했던 교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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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환 목사의 본회퍼 책 번역 후기

1918년생인 문익환 목사는 40대 중반에 디트리히 본회퍼의 ‘거마인저머 레벤’(Gemeinsame Leben)이라는 책을 <성도의 공동생활>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했다. 그런데 그 번역 후기가 좀 황당하여 옮겨 본다. (※ 1964년 초판본이라 표현들은 참작할 것) 본회퍼의 <성도의 공동생활> 역자 후기 “디이트리히 본회퍼, 그의 형제들 가운데 서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1906년 2월 4일 브레슬라우에서 출생. 1945년 4월 9일 플로센부르그에서 죽다.” (본회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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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목사의 “금치산자 박근혜”─4년

김동호 목사의 “금치산자(禁治産者) 박근혜 대통령 하야하라”는 글이 뜬다. 벌써 4년이 흘렀다고 알린다. 우리나라에서 4년 전에 선행된 광풍의 폭주가 미국에까지 미치는 가운데(트럼프 재선과 탄핵 선거 이슈 말하는 것)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옛글 알람이 울린 것이다. 이 글은 다들 꼭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도덕적으로는 큰 흠이 없는” 대통령이지만, “혼이 문제”라서 하야를 촉구한다는 이 황당무계한 글이 유포된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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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보다는 구텐베르크를─종교개혁 503주년

종교개혁 503주년이다. ‘서양 종교 기념일이 뭐 그리 중헌디?’ 반감이 앞서는 분 중에는 최근에 기독교인도 꽤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사회에 민족주의가 발흥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민족주의가 종교를 압도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종교보다 더욱 종교적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토템과 터부 시대로의 복고인 셈이다. 기독교를 포함한 유서 깊은 종교 중 서양에 기원을 둔 종교는 거의 없다. 서양을 경유한 동양 종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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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된 자들에 의한, 낙태된 자들을 위한, 낙태된 세상

‘낙태’란 말을 보통 유산(流産)과 구별된 의미로 쓰지만, 유산 자체는 본래 자연유산(stillbirth)과 인공유산(abortion)의 통칭이다. 낙태와 유산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독교 경전에서도 낙태는 유산(abortion)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시대 법리가 발달해서가 아니라 다산이 미덕인 시대에 인공유산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공유산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서로 다투다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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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제자와 히포크라테스의 제자

함께 읽을 글: 내가 의사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이유 구약시대의 의료 유대인은 하나님의 율법에만 순종하면 건강을 보장 받는다고 믿었다. 그 율법에는 여러 건강 관련법이 포함되어 있다. 정기적인 휴식, 양질의 음식, 오염된 물 엄금, 결혼 규정, 청결, 전염병 격리 등에 관한 규정이다. 형법과 연계된 이런 위생법은 다른 주변국보다 높은 수준의 건강을 안겨줬다. 하지만 건강이 형법 원리와 연결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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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위해 저항하지 않는 목회자들의 수법

이 글은 칼 맑스나 마오쩌둥 같은 근대기 유물론적 기수들이 고안해낸 변증법을 활용해 그들이 낳은 현대 사회주의 기독교 목회자들에 그대로 방법적 적용을 가한 해석학적 글이다. 예레미야 28장에 대한 주석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가 팽창하는 사회에서는 종교도 양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 사회가 그랬으며, 그들의 선조인 고대 이스라엘이 멸망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도 그러했다. 예루살렘은 그렇게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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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5 코로나 박해를 대하는 한국교회 엘리트주의 방식

코로나19가 지난 해 우리 사회를 강타한 이래 정부는 한국교회를 마치 전염병의 진원지인 것처럼 방역 시국에 적극 이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임에도 한국교회는 마치 100여 년 전 신사참배를 할 때처럼 ‘질서’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우상숭배의 길을 답습하고 있다. 어게인 1907 십여 년 전 ‘어게인 1907’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한국교회에 강타한 적이 있다. 2007년을 앞두고 몇 년간을 들썩였는지 모른다. ‘1907’이란 숫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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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의사들의 파업을 지지하는 이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이른 고대에도 눈에 칼을 대는 백내장 수술이 있었다는 보고는 깜짝 놀랄만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깜짝 놀랄만한 의료 기술에도 당시의 의사들은 치료에 실패하면 죽음을 면치 못하였다. 왕족과 세도가들이 그리 처후하였다. (의술은 왕족의 전유물이었던 걸 알 수 있다) 이런 열악한 신분을 신적 지위에까지 올린 것은 히포크라테스(Ἱπποκράτης)의 공적일 것이다. 자신들의 혈통을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Ἀσκληπιός)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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