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블루스 안에 너희들의 블루스—이 글은 <월드뷰>의 요청을 받고서 tvN 드라마 <우리들의 블루스>를 기독교세계관 안에서 리뷰한 글입니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이성복, <서시(序詩)>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월드뷰 편집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원고 요청이다. 테마가 평소와 달랐다. 기독교인의 레저? 이 주제에 관한 설명을 전화기 너머로 듣고 있는데, SNS를 켜 놓은 모니터 위로 갑자기 저 시(詩)가 지나갔다. 얼른 집어 담았다. 이 시와 한데 적어 놓은 해설은 이랬다. “…저녁을 때우러 간이식당에 들어왔지만 사내의 마음은 이곳에 있지 않습니다…사내는 몸과 마음이 따로 놉니다…사내는 자신이 없나 봅니다. 그녀가 문득 자신을 알아보기 만을 바라니까요…”(이정화님 facebook) 해설을 듣고 보니 한층 시의 은유가 절절하다.
이처럼 독자 내면의 상징에 호소하는 저술 방식을 고전 헬라어로 포이에티케(ποιητικῆς)라 부른다. 우리말로는 작시(作詩) 정도로 옮길 수 있겠다. 작시에는 이런 문자적 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고전적으로 그림, 이야기, 신화, 영화, 드라마 따위를 포괄한다. 비극은 작시의 주된 소재이다. 특히 드라마는 해설자 없이도 대중 자신이 내면에 지닌 체험을 통해 상징을 읽어낼 수 있기에 우리 시대에 각광을 받고 있다. 한마디로 즐거운 것이다. 비극이.
비극이 즐겁다고 하니 고개가 갸우뚱 할 수도 있겠으나, ‘비극의 목적은 즐거운 것’이라는 정의는 고대로부터 전수되어 온 작시 교범 중 하나다.1) 이것이 고전 작시뿐 아니라 현대 작시의 제1 테제가 되었다. 즐거움을 주도하는 이 메커니즘을 모방(μίμησις)이라 부른다. 우리가 드라마를 보면서 흘리는 눈물 메커니즘이다. 누가보더라도 가짜 이야기인 줄 알면서 보지만 경건하게 우는 행위이다. 이것이 현대인의 레저요, 모든 인간이 갖는 레저의 본질이다. 19세기 놀이 이론의 거장 호이징아(Johan Huizinga)는 이런 레저형 인간상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ce)라 규정했다. 루덴스는 “나는 놀이한다”라는 뜻의 라틴어 Ludent에서 온 말이다. “나는 놀이한다. 고로 존재한다”인 셈이다.
우리나라의 작시 기술은 세계적인 경지에 이르렀다. 할리우드에 소재가 고갈되었을 무렵 기생충과 오징어라는 극한 혐오의 매개로 서구를 강타한 것은 어디까지나 한국만이 구사할 수 있는 작시 기술에 기초한다. 혐오를 즐거움으로 모방해내는 기술이다. 이 고도의 작시 기술이 우리 삶에서 일어나는 신성한 비극을 녹여내 최근 <우리들의 블루스>라는 제목으로 우리 가슴을 강타했다.
그에 비해 월드뷰의 글이 상대적으로 딱딱하게 읽히는 것은 작시로 구성된 글이 아닌 까닭일 것이다. 월드뷰 필진들은 도리어 우리 문화를 뒤덮은 딱딱한 껍질을 깨뜨리고 거기에 은폐된 이념을 폭로한다. 이 글도 그런 불건전한 이념이 문화에게 수여한 경건을 깨뜨리려는 목적으로 구성했다.
인권 안에 인꿘
<우리들의 블루스>는 여러 단편의 몽타주이다. 등장인물의 이름으로 조합한 타이틀 아래 각 이야기를 전개하지만 전체는 이 단편들의 총합이다. 방영된 단편 순서 대로 소개해야 마땅하나 모든 단편을 담을 수는 없으므로 주요 뼈대가 된 소제들로만 재구성했다. <인권과 호식>편은 필자가 가장 처음 시청한 단편이면서도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이다.
인권과 호식은 각각 조폭 출신과 노름꾼 출신으로 서로 똑같이 아내가 도망가버린 절친이다. 두 남성에게는 같은 나이의 아들과 딸이 하나씩 있다. 두 아버지가 건달로, 노름꾼으로 인생을 허비한 것과는 달리 각 자녀는 전교 1, 2등을 다투는 수재다. 두 아버지는 서로가 위기에 빠지면 서로를 위해 목숨 걸고 지켜줄 정도로 형제보다 우애 깊은 친구였으나 사소한 일로 앙숙이 되어 철천지 원수처럼 지낸다. 그런데 이들 두 남자의 아들과 딸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사랑에 빠지고 결국 인권의 아들이 호식의 딸을 임신시킨다.
두 아이들은 고등학생.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은 기특하게도 낙태를 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소중한 생명을 반드시 지키겠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맞아 죽는 한이 있어도 아버지들에게 “잘못했다.”는 말은 하지 말자고도 다짐한다. 놀랍게도 이 애들은 아기가 잘못 생긴 게 아니라는 생명존중의 이념을 피력한다. “잘못했다.”고 말하면 아기가 잘못 태어난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태는 쉽게 정리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서로 앙숙인 두 무식한 아버지에게 각각 맞아 죽든지, 집을 나오든지. 그리고 과연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느냐…는 문제까지 첩첩산중이다.
충격적이게도 극중에는 이런 위기의 고등학생을 보호하는 법이 있었다. 드라마의 핵심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름하여 학생인권조례. 여느 시절 같으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퇴학 또는 전학을 가야 했지만, 이 미성년 고등학생들은 아이를 출산하고도 이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다.
이런 막장 우울한 옴니버스 스토리들을 제주도의 아름다운 배경과 음악으로 도리어 경쾌하게 전복시켜 이끌고 가는 이 드라마는 학생인권조례를 호혜적인 법령으로 묘사하는 데 성공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동성애 미화 전문작가 노희경의2) 탁월한 작시 능력에 따른 효과이지만, 이 전복된 분위기가 나 같은 사람에게도 호감이 유발하도록 만드는데 성공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내 나는 착시임을 깨달았다.
공교롭게도(사실은 공교롭지 않다) 이 드라마의 방영 시점은 교육감 선거를 포함한 지방자치단체장 선거 시즌과 맞물린 시기였다. 그러니까 선거 기간 내내 보수주의를 표방하던 교육감 후보들의 분열은 마치 솔로몬의 재판에서 아기 생명을 무참히 갈라내 버리도록 방치하는 창기의 감성 수준으로 각인이 된 바람에 상대적으로 수채화같은 이 드라마 속 학생인권조례가 더 우월해 보였던 착시였던 것이다.
작가와 제작자의 시기를 틈탄 이런 기도(企圖)는 <인권과 호식>이라는 타이틀에서 잘 드러난다. 우리가 <인권>을 사람 이름으로 독음하면 ‘인권ㅡ’이 되지만 ‘인권 조례’를 읽을 때는 인꿘이 된다. 이 드라마에서 둘은 같은 것이다. 학생 아버지 인권씨는 학생의 인꿘을 무시하고 마구 때린다. 이 드라마 여류 작가의 고도의 상징 주술이라 하겠다. 인권 안에 인꿘이 내재되도록 숨을 불어넣었던 것이다.
은희 안에 옥자
CJ(영화 기생충의 배급사이다)의 종합 연예 채널인 tvN에서 제작한 이 드라마는 제주도의 한 못생긴 여자를 주인공으로 두고서 인접 인물들의 각 사연을 옴니버스로 돌리는 스토리텔링이다. ‘한수와 은희’, ‘영옥과 정준’, ‘동석과 선아’, ‘인권과 호식’… 등장인물을 쌍으로 묶어 이야기를 전개한다. 사실 나는 1편을 보면서(작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뭐 이런 정신 나간 기획이 다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 주인공을 저 여성 배우로 기용했기 때문이다. ‘저 여성 배우’라 함은 여주인공이 이 드라마뿐 아니라 세계적인 한국영화 <기생충>에서 열연하는 모습까지 봤으면서도 내가 그녀의 이름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니 어떻게 저 여자를…’
그렇다. 나는 사람을 외모로 본다.
사람 외모를 소재로 만든 작시는 얼마든지 있다. 못생긴 여성이 성형을 하고 미남을 얻게 된다는 <미녀는 괴로워>. 어떤 재벌 집에서 몸이 불편한 딸을 위해 아주 별 볼 일 없는 남성을 돈 주고 데릴사위로 들였는데 이 남성이 아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 즈음 아내는 몸을 고쳤고, 그러자 남편을 버리는 이야기 . 이런 아류는 사실 외모가 소재이지만 진정한 주제는 내면이다.
그렇다. 우리는 외모로 내면을 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이 드라마의 첫 편인 <은희와 한수>는 내면을 빌미로 외모를 주제 삼는 기획물이다. 마치 ‘인꿘’을 위해 아버지 ‘인권’을 도륙 내듯이. 내면을 빌미로 외모를 도륙 내는 기획이다. 관객은 아름다운 풍경과 음악에 은폐된 이 작가의 폭력성을 알아채지 못한다. 은희와 한수 역의 배우 캐스팅은 그런 고려이다. ‘아니 어떻게 저 여자를…’이 바로 캐스팅 컨셉이다. 은희와 한수의 관계는 ‘우정-돈-사랑-외모’로 전개되지만 결국 최후에 남는 것은 우정이 아니라 은희의 외모이다. 우정으로 극복한 것은 사랑이 아니라 외모이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인꿘’의 장애는 ‘인권’이었듯이 이 여성 작가의 뇌리속에서 은희의 외모는 ‘장애’였던 것이다. 우리 대부분의 보통사람은 사람의 외모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못생겼으면 못생긴 것이고, 예쁘고 잘생겼으면 예쁘고 잘생긴 것이고, 그래서 사랑을 하면 하는 것이고, 사랑을 안 하면 안 하는 것이고…. 평범한 보통 사람의 외모를 장애라고 교시하는 이런 작가의 정신 세계를 퀴어라 부른다.
영화 <기생충>(감독 봉준호)에서의 열연으로 세상에 알려진 이 여주인공은 오랜 무명생활 끝에 봉준호 감독의 전작인 <옥자>에 캐스팅되었을 당시 실망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동물 ‘옥자’의 목소리 역이었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캐스팅 컨셉은 <옥자>와 다르지 않다. 은희 안에 옥자.
장애인 안에 비장애 사회
‘영옥과 정준 그리고 영희.’ 이 드라마와 작가에 대해 이어오던 회의적인 평가를 멈칫하게 만드는 꼭지이다. 장애인 관련 이슈로서 ─영희는 영옥의 다운증후군 쌍둥이 자매이다─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잘 구현했기 때문이다. 우선 작가와 제작팀 그리고 배우들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수채화 톤에 은폐된 이 작가의 폭력성을 왜 이 꼭지에서 만은 폭로하기 주저할까…를 생각해보았다. ‘장애’라는 주제가 일으키는 터부(taboo)가 작동한 탓일 것이다. (타이핑하는 이 순간에도 ‘장애인’으로 기재할 대목에서 ‘인’자를 지우고 ‘장애’라고 애써 완화를 시도하는 이런 터부를 말한다)
이 같은 회피와 그로인한 죄책 내지 침묵은 이 터부에 막강한 사회적 권능을 부여한다. 그리고 이 터부를 장악한 개인이나 집단은 그 막강한 권능을 독점한다. 그런 점에서 이 드라마의 권능은 수채화톤보다는 이런 터부의 선점에서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자살의 미학(선아), 자기 학대의 아름다움(동석), 그리고 미성년의 임신을 아름다운 권리로 다루는 작가의 폭력성을 이 터부와 묶어 침묵이라는 안전을 보장받기 때문이다. 인류의 형법이 인간의 터부에서 비롯되었듯이 이 터부는 인권 내지는 차별금지의 법을 산출해낸다.
그러나 차별이 없다는 진정한 의미는 이런 것이다. 내가 알던 다운증후군 청년이 은밀히 내게 말해준 게 있다. 자신과 같은 아이들 있는 시설에 가면 애들이 자꾸 자신의 주요 부위를 만지며 지속적으로 괴롭힌다는 것이다. 너무도 놀란 나머지 부모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그러자 부모님은 이미 알고 계신 듯 “그래서 이 아이들은 자기보다 수준이 높은 집단에서 생활하는 게 편하지, 더 낮은 집단에서는 어렵다.”라는 덤덤하고도 씁쓸한 전언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친구가 속한 교회 그룹 리더에게 잘 살펴줄 것을 특별히 당부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친구가 자기보다 약하고 만만한 아이에게 심각한 폭력을 쓰더라는 사실이다.
‘차별이 없다.’라는 진정한 의미는 이들이 일반적인 사회 구조와 동일한 사회를 구성한다는 인식에서부터 일 것이다. 한마디로 장애인 안에 비장애 사회이다. 따라서 차별 없는 진정한 사회가 구현되려면 사랑만으론 안 되고 돈이 많아야 한다. 돈이 매우 풍부해야 한다. 부유한 장애인과 부유하지 않은 장애인은 그렇지 않은 사람의 천국과 지옥 차이보다 더욱 맹렬한 격차를 가져오기 마련이다.
거듭, 돈이 많아야 한다.
돈에서 전문가들의 사랑이 샘솟기 때문이다.
그 돈과 사랑의 샘은 다름 아닌 자본과 기업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처럼 자본과 기업을 죄악으로 여기는 이념이 그 모든 터부를 선점하고 독점한 사회 정서로써는 이 하늘이 내린 천사들에게는 수채화 톤에 은폐된 ‘현실’이 기다릴 뿐, 천국은 요원하다. 선점한 이념이 이 터부의 독점을 빼앗길까 봐 사회를 더욱더 옥죄고 사회를 향한 죄와 벌로 일관하기 때문이다.
옥동석 안에 옥동자
이제 마지막 회 <옥동과 동석> 편이다. 이 드라마가 회를 거듭할수록 수위를 높이더니 마치 ‘…이래도? 이래도? 이래도 안 울래? 이 독칸 것…’이라고 나에게 말하는 것만 같다. 제아무리 금강석 같은 마음을 지녔더라도 누구도 비껴갈 수 없는 모든 사람의 내면을 까발려 초토화시키는 이 포르노의 주제는 부모 죽음에 대한 자식의 내면화.
영화 <프로메테우스>에 나오는 AI 로봇 데이빗은 대원들이 우주 수면에 잠든 사이 전 인류 역사를 비디오로 통달한 후 잠에서 일어나는 한 대원에게, “인간은 누구나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죠.”라고 말했는가 하면, 우리들의 트윗 대통령 고 이외수 선생께서는 <아버지의 훈장>에서 가출하면서 주정뱅이 아버지가 아끼는 훈장을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리고 내뺀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욕망에 종속되어 원수를 죽이지 못하는 <햄릿>은 자기 엄마를 대체할 수 없는 애인 오필리아를 너무나 사랑하면서도 학대하고 또 학대한다. 오필리아라는 이름은 공교롭게도 거부된 남근(O Phallus) 이라는 사실을 라깡이 밝혀냈다. 근본적 결핍에 둘러싸인 햄릿의 욕망은 언제나 상징계에서 나오지 못하는 실재계에 뚫린 구멍이라며…
그런 점에서 죽음은 자식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이 죽음을 선물 받지 못할 때 인간은 독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병들어 죽은 가난한 목사의 아들이나, 걸레를 걸치고 사는 저명한 주지 승려의 딸이나, 그리고 아버지가 독살당한 왕자님 햄릿이나…, 모두가 다 부모 죽음 앞엔 평등한 법이다.
이 아름답고도 성스러운 드라마의 작시에 은폐된 작가의 폭력성은 ‘옥동과 동석…’이라는 묘한 조합에 기제로 남아 있는 듯하다. 두 가지가 미스테리하다.
이 옴니버스 단편들의 제목이 한결같이 이름의 조합으로 구성되면서 다른 모든 행렬이 수평인 것에 반해, 오로지 이 ‘옥동과 동석’만 수직이다. 친구 또는 애인의 조합(‘인권과 호식’, ‘동석과 선아’ 따위의)처럼 수평이 될 수 없는 ‘어머니와 아들’ 관계의 수직 항렬인데도 ‘옥동과 동석ㅡ’이라는 수평으로 뒤집혔단 뜻이다. 특히 이 ‘옥동-동석’의 행렬 속의 거추장스러운 ‘동’은 생략을 일으킨다. 그 바람에 옥동(玉童子)을 떠올린다. 귀한 아들이니 그렇겠거니 싶지만 옥동은 옥구슬처럼 귀한 아들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옥황상제가 사는 옥경(玉京, 하늘의 서울)의 미동을 일컫는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혼합 불교에서는 이 하늘의 옥황상제가 사람 종자씨앗을 추수하러 온다고 여기는데, 사실상 이 종자는 상제가 뿌린 씨앗으로서 ‘옥경’이 남근을 높여 부르는 동음이의어라는 사실은 이 작가의 미완성된 내면화를 환유한다.
불교도로 알려진 이 드라마 작가의 법명이 금강심이다. 마음에 금강(金剛)을 두른다…라. 작가의 내면은 여자 햄릿인가…? 미완성 된 내면화가 대개 이렇게 폭력을 동화로 감싸길 꿈꾼다.
동화를 꿈꾸는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자기 내면의 폭력을 동화로 무마하는 레저가 나쁠 뿐. 그것은 실재계에서의 죄책과 화해의 책무를 상상계에 불과한 레저 속에서 동화라는 요법으로 전락시키기 때문이다. 이 요법을 작시의 고전에서는 카타르시스(κάθαρσις)라 부른다. 정화되었다고 속이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들의 블루스라기보다는 너희들의 블루스이다.
우리 사회는 문화뿐 아니라 법, 경제, 사회, 복지, 그리고 역사까지… 전 분야가 이 요법의 레저에 의해 전복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교회와 기독교 인구에도 불구하고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이 레저, 즉 문화에 대한 기독교인의 콤플렉스에 기인한다. 대개 문화는 죄된 것이라 일관하면서도, 사실은 교회가 옛 시대만큼 이 요법을 압도하지 못하는데 따른 콤플렉스다. 레저/놀이 행위는 기독교인에게 금제된 문화 행위인가, 허락된 문화 행위인가.
기독교인이 문화에 잠식당하는 이런 콤플렉스는 “땅을 정복하라”(창 1:28)는 말씀이 침략행위로의 오역이라며 선동했던 린 화이트(Lynn White) 같은 과정신학자들에 의해 진작되었을 것으로, 이는 “무릇 산 동물이 너희의 식물이 될지라”(창 9:3-4)는 새 창조의 시대를 주석했던 신약 시대의 새 문화를 간과한 탓일 것이다. 주님께서 가라사대,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행 10:1-22)인 것이다.
이것이 레저 곧 문화에 대한 정복 명령이다.
1. “παρασκευάζοντες…τραγῳδίᾳ…ἐπεὶ δὲ τὴν ἀπὸ ἐλέου καὶ φόβου διὰ μιμήσεως δεῖ ἡδονὴν παρασκευάζειν τὸν ποιητήν, φανερὸν ὡς τοῦτο ἐν τοῖς πράγμασιν ἐμποιητέον.” Aristotle, Poetics, 1453b, 10.
2. 드라마 ‘슬픈유혹’(KBS, 1999)과 ‘인생은 아름다워’(SBS, 2010)는 모두 이 작가가 쓴 동성애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