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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이 글은 하나님을 아는 것믿는 것에 관한 소고입니다.

제가 사실 며칠 전에 좀 다쳤습니다. 주차장 눈 밭에 묻힌 타이어 가이드 패킹을 미처 보지 못하고 걸려 넘어져 입술을 다쳤어요. 오랜만에 느끼는 순식간의 체험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순식간의 상황에 스치는 의식을 잘 포착하는 편이에요. 그 의식이란 언제나 이런 겁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이런 의식이 의식을 때리고 달아나는 것을 비교적 선명하게 의식하는 편입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그 이전에도 그랬습니다. 이 의식의 후려침을 미처 막을 수가 없습니다. 넘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듯이. 미리 생각했다가 생각을 꺼내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 3:25

라는 인식에 상응하는 인식일 것입니다. ‘이런 일’과 ‘두려워하는 그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뭘 두려워했던 거죠? 넘어질 줄 알았나? 깨질 줄 알았나? 터질 줄 알았나? 이런 선험의 의식에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전문용어로 신 인식 기능이라 명명할 수 있겠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여기에 ‘미감’을 적용해 도덕감으로 이론화하기도 했습니다만, 이는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타고난 하나님 인식 기능에 포함하는 게 맞아요.

이런 인식 기능을 부정한다면…, 그러니까 하나님을 부정하는 분이 저런 갑작스런 상황에 직면할 때는 주로 어떤 의식에 폭행당하는 지 궁금하네요. 무신론자였던 기억이 너무 오랜지라.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대신에 “오~ 나에게도 이런 일이…” 머 그런 기쁨이 떠오르는 걸까요? 아마 아닐 겁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는 신자나 무신론자 모두에게 폭행을 가하는 영혼의 포식자입니다. 두려움에 기초하기 때문이죠.

이런 두려움을 토대로 하나님도 인식할 수 있는 것이지만, 이런 신 인식 기능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 구원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란 뜻이죠.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인식 기능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이런 겁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

미 6:1-8

앞서 넘어질 때 의식된 것이 하나님 아는 기능이었다면, 이번엔 하나님을 믿는 기능에 대한 인식입니다.

지난 해에 체험한 일을 소개합니다.

2022년 10월 14일자 파워바이블앱 노트

이상한 체험이었습니다.

제가 파워바이블 앱을 개발한 후로 사용자와 매일 성경 통독을 해오고 있는데, 지난 해 10월 경인가? 하루는 심중에 성경 속의 어떤 운율이 계속 생각났어요. 저라고 성경을 달달 외우고 있는 건 아닙니다.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알지 못해요.

당시 제게 떠오른 운율이란, ‘…어떻게 하면… 기쁘시게 할까… OO으로 할까, …△△으로 할까…’ 머 이런 식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는 운율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날 미가서에 이 대목이 딱! 있는 거에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며 (내가 무엇을 가지고)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가지고 나아갈까…)”

미가서 6-7

신기하죠? 이 날 읽을 차례였던 미가서에 이것이 있으리라고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거든요. 딱 들어맞았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런 착한 생각을 문득 떠올릴 수 있는 감관을 가졌다는 사실이 중요한 거에요.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같습니다. “네가 성경을 읽은 사실이 있으니까… 또는 들은 적이 있으니까 떠오른 게지.”

이걸 아셔야 해요.

아버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어떻게 해야 할 지를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둔 모든 사람이 언제나 “내가 무엇을 가지고…아버지를 기쁘시게 할까?”라고 생각하며 사는 건 아니에요.

중요한 건, “내가 무엇을 가지고…아버지를 기쁘시게 할까?”라는 기능이 작동했다는 사실 자체에요. 그런 기능을 탑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겁니다.

그게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아버지를 볼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의식이 떠올라야 하거든요. (사람 새끼인 이상) 그런 사람은 없어요. 즉 우리가 사람 새끼가이 아닐 때만 아버지를 보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의식을 떠올리기 마련이죠.

그러므로 우리는 상기와 같은 이런 의식의 체계를 다음과 같이 종결 지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인식 기능으로는 구원 받을 수 없고, 오로지 믿는 의식을 통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보통 우리는 아버지를 대할 때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파괴적 의식을 억제하고 “내가 무엇을 가지고…기쁘시게 할까?”라는 의식을 통해서만 비로소 존재로서 안도할 수 있듯이, 하나님과 무엇인가로 교제하려는 의식만이 인식의 기능을 넘어선 관계로서 바탕을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는다’라는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행위입니다(히 11:6).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두려움의 의식 체계를 종식시키는 지속성의 원천인 까닭입니다.

또 그것은 마치 우리가 아버지를 한시도 “왜, 나에게 이런 일이…”라는 식으로 대하지 않고, “내가 무엇을 가지고…기쁘시게 할까?”로 대우함으로써 사람의 형상을 지속하려는 원리에 추인한 인식 구조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많은 사람이 천국과 지옥(특히 지옥)의 존재를 부정할 때 그것을 주도하는 의식은 자기를 길러준 아버지라는 자애로운 표상이 자연의 순리에 기초한다는 망상에 기인합니다.

그런데사실은 정작 자기 자신을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건 자기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가 기른 자식이라는 또다른 자연의 순리를 망각한 망상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녀가 아버지인 자기를 “내가 무엇을 가지고…기쁘시게 할까?”라고 대했다면 그것은 자연스런 순리가 아니라 배워서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도덕을 우리가 믿음이라 통칭합니다. 종교의 교리로 표방되는 노예의 도덕이나 원숭이가 사람으로 발전하는 발전 도덕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히브리서 11:5c-6a

주현 후 제4주차: 미 6:1-8; 시 15; 고전 1:18-31; 마 5:1-12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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