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3주년이다. ‘서양 종교 기념일이 뭐 그리 중헌디?’ 반감이 앞서는 분 중에는 최근에 기독교인도 꽤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사회에 민족주의가 발흥한다는 방증일 것이다. 민족주의가 종교를 압도하는 것은 민족주의가 종교보다 더욱 종교적으로 임하기 때문이다. 토템과 터부 시대로의 복고인 셈이다.

기독교를 포함한 유서 깊은 종교 중 서양에 기원을 둔 종교는 거의 없다. 서양을 경유한 동양 종교들이 있을 뿐이다. 동양의 종교들이 서양에서 토템과 터부를 제거당하고 다시 역류하는 이치다. 이것을 우리가 종교개혁이라 부른다.

특히 개신교는 그 성격 자체가 서지 혁명이기 때문에 개신교가 우리 사회에 처음 경험되었을 때부터 서지(書誌), 즉 글과 기록이라는 체험으로 강타했다. 기독교와 성서가 우리 사회의 문맹률을 현저히 감소시킨 역량은 사회적인 영역이지 종교적인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은 태생 자체가 종교를 사회가 변혁시킨 사실에 유래한다.

흔히 종교개혁을 떠올리면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A4지 몇장 꽝꽝 못박자 사람들이 촛불 들고 벌떼처럼 일어난 기획 선동인 줄 알지만, 여러 신분의 사람이 이미 저마다 자신의 위치에서 각자의 필요를 절감하여 일어난 점진적이고도 지속적인 혁신 운동이라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점진적이고도 지속적인 개혁의 중심에는 바로 구텐베르크라는 인물과 그의 혁신이 자리한다.

종교개혁의 완성이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덕분이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종교개혁의 구심축을 언제나 마틴 루터로 지목하는 관행 때문에 구텐베르크는 마치 마틴 루터의 피고용인처럼 연상되지만 종교개혁은 구텐베르크가 죽은 지 50년 뒤에 일어나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마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거사는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의 최종 결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개혁은 서지 혁명이기 때문이다. 이 서지 혁명은 구텐베르크의 생애에 걸쳐 전개되었다.

마인츠 태생인 구텐베르크는 본래 귀족 출신이지만 계급 다툼이 한창이던 시기에 추방당한 아버지를 따라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자란 인물이다. 그는 상인 계급으로 거듭났다. 상인 및 수공업 장인 계급의 중흥은 오랜 세월 진행된 십자군 전쟁의 여파이다. 종교개혁을 향하여 세력이 무르익어 가던 시기이다.

구텐베르크가 인쇄기를 디자인할 때는 백지 상태에서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다. 그의 아버지가 세력 다툼에서 밀려 이주하기 전에 하던 일은 조폐국 금화 찍어내는 일이었다. 금화 생산에 필요한 압착기 기술은 구텐베르크 인쇄기에 있어서 중요한 메커니즘이다. 포도주 즙을 짤 때 사용하는 압착기를 변형하여 중량을 늘리고 일종의 나사식 볼트를 고안해 활자판을 안정적으로 누를 수 있도록 하여 정교한 인쇄가 가능하도록 했다.

그렇지만 인쇄는 이런 하드웨어로만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활자 기술이 있어야 한다. 스티브 잡스의 80년대 매킨토쉬 컴퓨터를 반도체 혁명 정도로 아는 사람도 있지만 폰트(서체/활자) 혁신이 핵심이었다는 사실은 구텐베르크의 경우와 같은 것이다. 구텐베르크의 활자판은 각 글자를 그룹으로 묶어 정교하게 절단하도록 만들어진 주형을 통해 생산되었다. 그리고 잉크의 문제도 있었다. 인쇄시 잉크는 더하지도 덜하지지 않게 특히 번지지 않게 도포되어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기술이 유성잉크 기술이다. 이러한 인쇄술을 오늘날 옵셋 인쇄라 부른다.

이러한 인쇄 기술은 수도원의 수도사가 하는 일을 대체해버렸다.

종교개혁
구텐베르크의  42-Line Bible이라 불리는 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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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구텐베르크의 성경’, 하면 백지에 검정 글씨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상기와 같이 화려한 인쇄 판본이다. 아래와 같은 필사본을 대체해버린 것이다.

1240-1260년대 필사본 (독일)

필사본의 당시 가격은 어마어마 했다. 집을 몇 채나 살 수 있는 값어치였다고 전한다. 종이 대신 사용되는 송아지 양피지가 1-2,000장이 필요한 이유도 있었겠지만, 성서에 대한 교회의 독점권은 그런 가격대에서 결정되었다. 단지 교권만이 성경과 대중의 만남을 가로막은 것은 아니란 뜻이다.

성경의 대중화로 인해 수도원과 수도사들이 독점하던 필사본의 매력이 사라진 일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로 인하여 수도원과 수도사들의 내부적인 부패는 자연스럽게 소멸되어 갔다. 수도원과 수도사 수요 자체가 구미를 잃어간 것이다.

구텐베르크 성경의 미려함은 필사본을 압도했다.

그러나 구텐베르크는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다. 상기의 <42행 성서>라 불리는 ‘구텐베르크 성경’을 출판할 당시 요한 푸스트라는 자본가에게 자금을 대여한 것이 결국 성경 사업권을 빼앗긴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소송의 결과는 참담했다.

인쇄기 한 대만 건진 그는 작은 도시로 이주하여 남은 생애를 성경 인쇄에 보냈다고 하는데 이는 전기작가들이 만든 신화일 것이다. 저 <42행 성서>외에는 근거로 남은 게 없고 말년에는 시력을 완전히 잃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인쇄 혁신으로 인해 그가 죽은 후 마틴 루터가 등장하여 종교개혁을 감행할 시점에는 인쇄본 성경이 무려 900만 권 이상이 출판된 상태였다. 물론 이 성경의 언어는 제롬이 번역한 라틴어 불가타 성경이다.

‘종교개혁─마틴 루터─쿠텐베르크’, 조합을 떠올리면 마치 혁명가가 인쇄소를 찾아가 이 혁명 전단을 인쇄해주시오! 하고 전개된 거사로 연상하지만 성경의 대중화는 이미 출발을 한 상태였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한다. 구텐베르크의 초기 인쇄술은 면죄부를 찍어 파는 일에 종사하였으나 폭발적인 성경 인쇄 사업으로 이행한 것이다.

이것은 마틴 루터의 공적을 깎아내리고 구텐베르크의 공적을 높이 사려는 취지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어떤 추동이 발현되었을 때 그 추동에 담긴 기제가 영속적으로 작동한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함이다.

구텐베르크와 마틴 루터. 상공인과 종교인, 서로 영역과 분야는 다르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 혁신은 마틴 루터의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와 만났을 때 서지 혁명이라는 충격파가 되었다. 이것이 문자/서체 체계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것이다. 이 전통에 입각했을 때 우리 사회는 토템과 터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가 토템과 터부를 압도하는 마력을 소유해서가 아니라 그 문자와 서체가 지닌 힘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토템과 터부를 벗겨내는 힘.

이처럼 문자와 서체가 지닌 힘이 실제계에서 역동한다는 사실은 상대적인 개념을 통해서도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데,

바로 다음의 경우처럼 서체가 지닌 또 다른 힘이다.

신영복
처음처럼. ‘부드러운’ 소주 광고

종교개혁 기념 글을 소주 광고로 마무리하게 되어 미안하지만 2020년 종교개혁 기념일에 즈음하여 이 소주병을 안 떠올릴 수가 없다. 정확히는 소주가 아니라 소주 라벨에 적힌 글씨이다.

이 서체는 아마도 민족주의로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 문화와 종교를 불문하고 가장 영향력을 끼치는 모종의 영적 기운을 표지하는 서체일 것이다.

처음처럼. 소주가 ‘부드럽다’…라…

서체의 원작자에게 뒤집어 씌운 고난 받는 의인 메타포는 알콜에 대한 상업적 마케팅으로는 성공적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정치·경제·문화에 끼친 여파는 가히 파괴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기서 이 ‘부드러움’은 언제나 서체의 필사자로 하여금 부드러운 이미지로 존재하게 하지만, 자신의 서체를 받아든 그 수령자에게서는 토템과 터부 특유의 강력한 기제 곧, ‘내가 앙갚음을 하리라!’로 임하기 때문이다.

서체에 담긴 놀라운 주술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기독교인만큼은 이 ‘토템과 터부의 약속’에서 부디 벗어나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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