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호 목사의 “금치산자(禁治産者) 박근혜 대통령 하야하라”는 글이 뜬다. 벌써 4년이 흘렀다고 알린다. 우리나라에서 4년 전에 선행된 광풍의 폭주가 미국에까지 미치는 가운데(트럼프 재선과 탄핵 선거 이슈 말하는 것)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옛글 알람이 울린 것이다.

이 글은 다들 꼭 다시 읽어볼 필요가 있다.

김동호 목사
발췌: https://bit.ly/38kYzXR
발췌: https://bit.ly/38kYzXR
참고: https://bit.ly/2GHpz8w

도덕적으로는 큰 흠이 없는” 대통령이지만, “혼이 문제”라서 하야를 촉구한다는 이 황당무계한 글이 유포된 지 4년이 흐른 것이다. 4년이 흐른 지금 이 분에게는 얼마나 행복한 시간이 흐르고 있는지 모르겠다.

위 글에 대한 4주년에 대한 답례로 글을 하나 붙이고 싶은데 다음의 인용 본문 하나로 대신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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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öttgen Pietà

“고대 왕국을 두고, 백성은 오로지 군주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전제 국가였을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가 생각하는 군주 제도에는 전혀 적용될 수 없다. 백성이 군주를 위해서 존재하기는커녕 정반대로 군주야말로 백성을 위해서 존재했다.
군주의 목숨은 백성을 위하여 자연이 제대로 운행되도록 명령함으로써 그 지위가 지니는 의무를 다할 때만 귀중했다. 군주가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순간, 그때까지 백성들이 그를 향해 기울이던 배려, 헌신, 종교적이기까지 하던 경의는 온데간데없어지면서 바로 증오와 경멸의 대상으로 바뀐다.

그런 군주는 불명예스럽게 왕좌에서 쫓겨나는데, 이 경우 운이 좋아야 목숨을 보전할 수 있다. 신처럼 섬김을 받다가 어느 날 문득 범죄자처럼 처단당하는 것이 그들의 군주였다.

남부 기니의 케이프 파드론 부근에 있는 샤크 포인트(상어갑)의 사제왕(司祭王) 쿠쿨루는 숲속에서 홀로 산다. 이 왕은 여자에게 손을 댈 수도 없고 그 집을 떠날 수도 없다. 사제왕인 그는 왕좌를 떠날 수 없다. 그래서 잠도 왕좌에 앉은 채로 잔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그가 바닥에 눕는 순간부터 바람이 일지 않아서 배라는 배는 모두 그 자리에 멎고 말기 때문이다.

그는 바람을 단속할 뿐만 아니라 대기의 상태를 일정한 수준이 되도록 보살핀다.

지배자에 대해 원시인들이 가진 태도의 또 한 측면은 신경증에서는 흔한 사례이면서도 그 과정은 피해망상(Verfolgungswahn)으로 알려진 신경증의 경과를 상기시킨다. 가령 한 특정인이 지니는 의미가 턱없이 과장되고 이 특정인이 행사할 수 있는 절대적인 능력이 터무니없는 선까지 확장되는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환자들이 체험하게 되는 바람직하지 못한 일에 대한 모든 책임은 모두 이 특정인에게 전가된다. 왕에 대한 미개인들의 태도가 이 환자들이 취하는 태도와 똑같다.

미개인들은 저희들 왕에게는 비와 햇빛, 바람과 일기를 통제하는 능력이 있다고 여긴다. 이렇게 믿고 있다가 자연으로부터 성공적인 사냥과 풍작에 대한 희망이 배신당했다고 여기는 순간 이 책임을 왕에게 돌려 왕좌에서 내쫓거나 죽이거나 한다.
기독교의 신화도 이러한 왕의 진화사의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Freud. Totem and Taboo (1913).
Totem und Tabu (1913)

기독교가 어떻게 토템과 터부의 한 종교로 전락하는지 이보다 더 잘 표현된 분석은 없다. 프로이트의 <토템과 터부>라는 논고 중 한 대목이다. 국내에서는 <종교의 기원>으로 재편되어 소개된 바 있다. 프로이트는 이 논증을 다음과 같은 실증 자료를 토대로 구성하였다. 기왕에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이 실증 자료도 한 소절 읽어보면 좋다.

제임스 프레이저가 오지 선교사들의 문진을 토대로 구축한 방대한 라이브러리로서 기독교인마저 미개인으로 퇴행시키는 원리를 실감 나게 담고 있기 때문이다.

“콩고강 어귀에 있는 봄마 숲 한 언덕 위에 ‘남불루 부무’라는 비와 폭풍의 왕이 살았다. 나일강 상류의 부족들에게는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왕은 없다. 그 부족들이 왕으로 승인하는 유일한 사람은 비의 왕뿐이다. 그는 우기에 비를 내릴 수 있게 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고 있었다.

3월 말에 비가 내리기 시작할 때까지 이 지방은 메마른 불모의 사막이다. 그 때문에 부족의 중요한 재산인 가축들이 목초량의 절대 부족으로 죽어간다. 그래서 3월이 끝날 때가 가까워지면 부족의 주민들은 비의 왕 앞에 가서 바싹 말라버린 목초지에 하늘의 물을 달라고 송아지 한 마리씩 바친다. 만일 비가 내리지 않으면 부족 사람들은 비의 왕 앞에 몰려와 비를 내리도록 강요한다.

그래도 여전히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들은 왕의 배를 가른다. 부족 사람들은 왕의 뱃속에 폭풍우가 간직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James G. Frazer, THE GOLDEN BOUGH.

그러니까 프로이트와 프레이저의 실증에 따르면, 혼이 건강하지 않아 내쫓고 싶다고는 했지만 사실은 독신 여성 통치자의 배속에서(in the womb) 침몰한 배를 건져올리겠다는 망상(Verfolgungswahn)에 일조했던 관음 행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대중적이면서도 가장 영향력 있다는 성직자들이 이 사회에 쏟아 놓은 배설이다. 앞으로 기독교계에 이런 성직자들이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기록으로 남겨둔다.

이들이 배설로 남긴 기독교는 기독교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포퓰리즘에 기초한 집단성으로 그 야만성은 이 로젠 피에타의 도상에 담긴 인상으로서 외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다.

Röttgen Pietà, from the Rhineland, Germany, ca. 1300-1325.  Painted wood, 2′ 10 1/2″ high.  Rheinisches Landemuseum, Bon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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