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란 말을 보통 유산(流産)과 구별된 의미로 쓰지만, 유산 자체는 본래 자연유산(stillbirth)과 인공유산(abortion)의 통칭이다. 낙태와 유산이 구별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기독교 경전에서도 낙태는 유산(abortion)과 구별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 시대 법리가 발달해서가 아니라 다산이 미덕인 시대에 인공유산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인공유산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 같지는 않다.
서로 다투다 임신한 여인을 쳐서 낙태하게 하였을 때는 벌금 처벌을 받는 경우도 있었던 까닭이다(출 21:22). 유산의 원인을 의식하고 있었던 셈이다.
보다 정교한 의미로서는 낙태된 생명도 ‘존재’로 인식한 흔적이 있다.
욥은 “낙태되어 땅에 묻힌 아이처럼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면…” 하고 바랐다. 특히 그는 그렇게 낙태된 생명을 가리켜 “빛을 보지 못한 아이들”이라며 존재로 명시했다(욥 3:16).
2세기 초 교회 지도자인 오리겐은 플라톤의 영혼 선재설을 따라 아기가 생성되기 전부터 영혼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렇지만 출생하는 시점에 영혼이 창조되어 결합하는 인상을 주는 본문이 없는 건 아니다. 창세기 2장 7절, 전도서 12장 7절, 이사야 57장 16절, 스가랴 12장1히절, 히브리서 12장 9절은 다 영혼창조설에 인용되는 대표적인 예시이다.
(아담을 제외한) 인류의 영혼이 남성과 여성이 결합하여 생성하는 단계에서 직접 생산되는 것이라는 합리적 이해가 도입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일이다. 창세기 2장 2, 21절, 로마서 5장 1절, 히브리서 7장 9-10절을 토대로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6:3, 그리고 찰스 핫지(Charles Hodge), 레이몬드(Robert L. Reymond) 등이 이와 같은 입장이다.
12세기 중세까지만 해도 가톨릭은 임신한 태아의 영혼을 이해할 때 “영혼 없는 태아”에서 “영혼 있는 태아”로의 발전단계로 규정하다 13세기 들어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남자의 배아는 임신 40일 후, 여자 배아는 90일 후 “영혼이 불어 넣어진다”고 규정하였다. 다소 미개한 논리지만.
이것은 성서 지식이라기보다는 논리의 조직이다.
창세기 2장 7절에 나오는 네페쉬 하야(נֶפֶשׁ חַיָּֽה)란, 그야말로 살아있는 존재로서 어떤 지식이나 이성을 초월한 존재 자체로서의 개념인 바, ‘배아’라 하여 영적 존재가 아닌 것으로 여기는 개념을 성서의 인식으로 볼 수는 없는 이유이다.
심지어 배아가 되기 전 태어나지도 않은 후손을 (아브라함의 허리에 들어있는) 존재로 여겼던 관념 따위를 기억할 것이다.
이는 어떤 관념이 아니라 연대된 생명으로서의 인식이었다.
한글 성경에는 낙태라는 말이 8번 정도 나오는데, 사실 명시적인 낙태라는 개념으로서 어휘는 욥기 3:16에 나오는 네펠(נֵ֣פֶל)일 것이다.
untimely birth, 즉 ‘조기 출산’이라는 뜻의 명사이지만 ‘떨어지다’라는 동사 나팔(נָפַל)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고대에 과연 현대적인 의미의 abortion, 즉 ‘인공유산’ 내지 ‘인공낙태’가 있었을까.
당연히 있었다.
다만 현대인에게는 낙태를 어떤 ‘의술’이라 여기는 교묘한 관념을 구현한다. 그래서 그 ‘의술’이 가하냐 불가하냐로 판단을 내리려 한다.
그러나 본질상 낙태는 의술이나 과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이다. 의료적 기술 이전부터 그 어휘가 정확한 의미를 포함하고 있듯이 그것은 ‘떨어지다’인 것이다.
욥기와 창세기는 거의 동시대 언어로서 창세기에 나오는 이 대목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이 ‘네피림’이라는 명사가 바로 나팔(נָפַל)이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다.
한 마디로 ‘낙태된 자들’이라는 소리다.
이들 네피림은 하늘(하나님의 아들)이 땅(사람의 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그야말로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은 결과로서 존재라 할 수 있다.
1세기 예수 시대는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 자체가 ‘낙태된 세상’이었다. 종교적으로 이 세상을 영지주의라 부른다. 모든 사람이 하나 같이 자신을 낙태된 것만 같은 존재로 여긴 것이다. 현대에도 이런 네피림은 얼마든지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목격한다.
지금 우리 사회의 권력이 주입하고 있는 교시는 언제나 ‘낙태된 세상’인 까닭이다. ‘헬조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대한민국’…. 그런 다음 자신들이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아 낳은 듯, 사생아 같은 자신들의 죄상들은 모조리 낙태시킨다. 그들의 모든 죄상은 세상에 빛도 못 본채 덮인다. 낙태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들이 기도하는 낙태 합법화 기조는 너무나 당연한 절차로서, 낙태를 ‘의술’로 보게 만드는 수법은 네피림으로서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얻으려는 전략적 윤리에 불과하다.
유대/기독교 성서는 자연유산(stillbirth)이나 인공유산(abortion), 둘 모두를 죄(ἁμαρτία)로 보는 시각을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