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칼 맑스나 마오쩌둥 같은 근대기 유물론적 기수들이 고안해낸 변증법을 활용해 그들이 낳은 현대 사회주의 기독교 목회자들에 그대로 방법적 적용을 가한 해석학적 글이다. 예레미야 28장에 대한 주석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가 팽창하는 사회에서는 종교도 양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예루살렘이 무너진 1세기 팔레스타인 유대교 사회가 그랬으며, 그들의 선조인 고대 이스라엘이 멸망해 예루살렘이 함락될 때도 그러했다. 예루살렘은 그렇게 두 번 파괴되었다.
그런 사회가 도래하면 하늘에서 떨어지는 불덩어리의 빛깔도 둘로 갈라지는 법이다. 메시지가 양분된다는 소리다.
그 양분된 메신저로서의 표상을 꼽으라면, 한편에 예레미야를 다른 한편에는 하나냐를 세울 수 있다.
한 사람은 낙관론자이고 다른 한 사람은 비관론자이다. 예언자이자 선지자인 이들은 자신의 낙관론으로 혹은 비관론으로 사람들에게 미래를 펼쳐보인다.
이때 낙관론을 펼치는 예언자는 대개 계시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대에 의존한다. 특히 그 기대를 경험으로 변용하는 기술을 구사한다. 과거에 이러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고대의 이 낙관론자는 이르기를 과거에 침략자(산헤드립)들이 들이닥쳤을 때 하나님의 보살핌으로 침략자들이 어떻게 순순히 물러갔는지 경험을 말한다.
반면, 비관론자는 경험과 기대에 의존하지 않는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 토대로 계시를 직접 작성한다.
능란한 낙관론을 펼치는 예언자의 이름은 하나냐.
절박한 비관론을 펼치는 예언자의 이름은 예레미야.
하나냐가 구사한 낙관의 기술은 이런 것이다.
1) 구체적인 사실을 추상적인 기대로 바꾸고, 2) 그 추상적인 기대에서 다시 구체적인 기대로 바꾼 다음 최종적으로는, 3) 질을 양으로 바꿔치기 하는 수법이다.
이전에 일어났던(산헤드립이 거저 물러갔던) 경험에 의존해 추상적인 기대를 구체적인 기대로 탈바꿈시킨 다음, 거기서 추론되는 ‘평화’(질)를 자신의 안전한 ‘지위’(양)로 바꿔치기 한다.
이것이 이들의 예언이다.
Covid-19 시대를 지나오면서 멀쩡한 예배를 폐쇄당하고도 저항의 말 한마디 못하면서 오히려 폐쇄당한 예배를 나무라고, 낙관을 입힌 새 예배를 선호하는 우리 시대 목회자들은 이 대열에 포함될 것이다.
하늘의 계시를 직접 작성했다기보다는 가이사가 부르는 평화의 노랫말 가사를 받아 적는 것에 불과하다. “평화가 경제다” 뭐 그런 가사들이다.
이런 부류의 선지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부르주아지이다.
계시를 직접 받아본 일이 없다. 기대를 양으로 바꾸는 변용에 능할 뿐.
반면, 예레이야는 낙관론자들에 비하면 예언에 관한한 철저하게 유물론자이다.
추상적이지 않기 때문에.
사물을 직시하고 통찰한다. 이것이 그가 ‘직접’ 작성하는 계시의 실체이다.
가이사의 노랫말을 설교하는 자들과는 달리 직접 받아 기록해 전해야 하는 예레미야는 그야말로 말씀의 노예이다.
예배를 고수하는 목회자들이 이 같은 노예들일 것이다.
이들은 하나냐와 달라서 예배를 추상화할 줄 모른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려야 한다’며 추상화시키는 자들과는 다르다. 그들이 추상화한 예배에서 자신들의 ‘양’(量)으로 바꿔치기 할 때에도 이 노예들은 추상화된 낙관론을 배격할 뿐이다.
추상적인 ‘기대’를 물(物)로 바꾸는 저 기획은 언제나 맘몬이다.
자고로 마오쩌둥은 추상적인 질(質)에서 물(物)로 치환하는 기술을 혐오하였으나, 마오쩌둥이 칭송한 노예는 오히려 예레미야와 그의 후예들인 반면, 마오쩌둥이 싫어한 수법을 쓰는 하나냐의 후예들은 오히려 마오쩌둥과 친숙한 사회를 살아간다. 이것이 이 변종 시대의 특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