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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이란 말은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면 아마 다들 “‘출애굽기 34장 28절이나 신명기 4장 13절이나 10장 4절에 나오는 ‘십계명’은 뭐냐?”라고 할 것이다.

그것은 단지 아쉐레트 다바림(עֲשֶׂ֖רֶת הַדְּבָרִֽים) 곧 ‘10개의 말들’이지 미츠바(מצוה)나 호크(חוֹק)나 미쉬파트(משפט)가 아니다. 계약법을 미츠바, 종교 계율을 호크/후카, 사회법을 미쉬파트라고 분류한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우리에게는 ‘십계명’으로 알려진 이 ‘아쉐레트 다바림’(10개의 말)은 약간 다른 개념이다. (그래도 편의상 이 글에서는 ‘십계명’으로 부르겠다.)

십계명의 가치 핵심은 그 10개 다바림(말들)의 축소와 확대에 있다.

‘축소와 확대’란 개념에 앞서 우선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과연 두 개의 돌판에 이 열 개의 계명을 다 새겨넣을 수 있었을까? 돌이 얼마나 커야 다 새겨넣을 수 있으며, 얼마나 작아야 양손에 두 돌판을 들 수 있을까? 성경은 분명하게 ‘두 돌판’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모세가 “내 두 손으로” 들었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명시적으로 열 개의 계명이란 출애굽기 20장 전체임을 고려할 때, 어떠한 형태로든 축소는 불가피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다음과 같은 문안들,

1)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
2) 너를 위해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3)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5) 네 부모를 공경하라.
6) 살인하지 말라.
7) 간음하지 말라.
8 ) 도둑질하지 말라.
9)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0) 네 이웃의 집(의 소유)을 탐내지 말라.

이 문장도 대부분 축소(또는 확대)된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축소와 확대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더해지거나 감해지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고증 문제가 모세와 십계명 돌판을 주제로 그린 여러 작품에서도 고스란히 반영되고 있다. 모세와 돌판이라는 주제는 공통적이지만, 그 돌판에 새겨진 텍스트는 다 제각각이다.

가령,
■ 19세기 판화가 구스타프 도레(Dore, Gustave, 1832-83)의 에칭에서는 돌판 위의 글자가 다 흘려져 있다. 대충 써.

십계명
by Dore, Gustave(1832-83)
by Dore, Gustave

■ 줄리어스 카롤스펠트(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1794-1872) 작품에서는 아예 1, 2, 3… 숫자만 적혀있다.

by Julius Schnorr von Carolsfeld

■ 그런가 하면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필립 샹패뉴(Philippe de Champaigne)의 십계는 아주 사실적으로 텍스트를 묘사하고 있지만, 이렇게 다 적어놓고 보니 과연 노인이 저걸 들고 다닐 수 있을지… 집어 던지다 뒤로 나자빠질 것 같다.

by Philippe de Champaigne

■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찰튼 해스톤의 <십계>에서 본 돌판은 영화 자체가 지나치게 고증에 신경을 쓴 작품이다보니 상형문자에 가까운 문자(Paleo-Hebrew)를 옮겨오기도 했다.

영화 <십계> 중에서

■ 우리가 오늘 주목해야 할 작품은 바로 렘브란트(Van Rijn Rembrandt,1606~1669)의 작품이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축소 타입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기 때문이다.

by Van Rijn Rembrandt

찰톤 해스톤의 돌판보다 더 의미가 있는 이 렘브란트의 돌판들은 얇은 두 개가 겹쳐 있어 뒤에 있는 것이 1-5계이고, 앞에 보이는 것이 6-10계에 해당하는 돌판이다.
로 틸짜, 로 틴앞, 로 티그노브….라 쓰여 있다.

부분 확대

다시 강조하지만 축소의 문제는 중요하다. 어떻게 축소하느냐에 따라 다시 확대될 때 다른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가령, ‘너는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하지 말라.’를 줄인다면, 가장 중요한 말은 무엇인가? ‘너’인가 ‘나’인가 아니면 ‘신’ 또는 ‘다른 신’인가? 또 2계인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에서 중요한 건 ‘너를 위하여’인가, ‘우상’, ‘만들지 말라’인가ㅡ.

저 렘브란트의 판본을 참고로, 회당에 전해내려오는 축소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주로 성서 본문의 첫 단어에 치중되었지만, 이런 중요성이 있다.

현대에 정형화된 히브리어 축어

제 1계, 아노키 야웨(אָֽנֹכִ֖י֙ יְהוָ֣ה) I AM YHWH

ㅡ“나는 하나님이다” 이것이 제1계이다. 축소가 되면 “나 외에 다른 신을…” 이런 말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하나님(야웨)이다!” 이 축소본으로 하늘과 땅을 가르는 것이다.

제 2계, 로 이에/하야(לא יהיה) you shall not have

ㅡ“있게 하지 말라” 이것이 2계이다. 우상이란 말이 필요 없다. 나무로 새긴 우상, 돌로 새긴 우상, 마음에 새긴 우상.., 우상의 종류가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있게 하지 말라”. 이 한 축소로 모든 우상이 일소되는 것이다. 특히 하야(יהיה)는 1계와 마찬가지로 존재 동사이다. 1계는 “있다(이다)”였던 반면, 2계는 “있게(되게) 말라”(없다) 이다.

제 3계, 로 티사(לֹ֥א תִשָּׂ֛א) not take

ㅡnot Take라기보다는 더 정확히는 “올리지 말라”이다. 그분의 이름을 (입에)올리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Jesus!(제기럴)로 쓰는 것뿐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언급하는 자체가 망령된 것인 셈이다.

제 4계, 자코르 에트 [욤] (זָכֹ֛ור֩ אֶת) remember (the day)

ㅡ“기억하라” 이것이 제 4계이다. 하나님의 얼굴이나 이름이나 어떤 주요 계명이나…그런 것들이 아니라 바로 the Day(욤), ‘날!’을 기억하라. 그래서 제칠 안식교는 금/토를 준수하지만 여기서의 날은 금/토/일요일이 아니라 the Day이다. 개신교는 그리스도의 부활 아침을 준수한다. 그것이 the Day이기 때문이다.

제 5계, 카베드 에트 [아비카, 이메카] (כַּבֵּ֥ד אֶת) Honor your father and mother

ㅡ“공경하라” 이것이 제5계이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 아니라 부모로 되어 있다. 이 5계는 매우 경계적 계율이다. 6계부터는 확실히 이웃 또는 사물에 관한 조항이고 5계 부모 역시 이웃일 수 있지만, 5계는 앞의 1계, 2계, 3계, 4계와 마찬가지로 상향의 운율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공경하라ㅡ”.
하나님은 존재 자체로서 대상이고(하야: “있다”[야웨], ”있게 말라”[우상]), 이름은 높임(티사)의 대상이고, 부모는 “공경”의 대상임을 감안할 때, 제5계 ‘공경’은 하나님과의 연장 관계로 소급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하는

제 6계, 로 틸짜(לֹ֥֖א תִּֿרְצָֽ֖ח) Not do muder

ㅡ“살인하지 말라”

제 7계, 로 틴앞(לֹ֣֖א תִּֿנְאָֽ֑ף) Not do commit adultery

ㅡ“간음하지 말라”

제 8계, 로 티그노브(לֹ֣֖א תִּֿגְנֹֽ֔ב) Not do steal

ㅡ“훔치지 말라”

제 9계, 로 타아네(לֹֽא־תַעֲנֶ֥ה) Not do bear/testify

ㅡ“처신하지 말라”

제10계, 로 타모드(לֹ֥א תַחְמֹ֖ד) Not do covet

ㅡ“탐하지 말라”

따라서 십계의 분류는 일부 학자들이 분류하듯
1~4=신과의 관계, 5~6=대인 관계로 규정하거나
1~3=신과의 관계, 5~6=대인, 7~10=대물 관계, 그리고 그 중심선상의 4계인 안식일 구조로 규정하는 것보다
한 쪽 돌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부모 포함),
다른 한 쪽 돌에는 대인 관계로 보는 것은 합당하다.
상기의 축소가 그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와 같은 축소의 방식은 명사가 아닌 동사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유념할 것이다.

동사 중심의 축소는 613가지의 도덕법 미츠바(מצוה)뿐 아니라 종교법 호크(חוֹק), 사회법 미쉬파트(משפט)를 무한정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 근원이 되었다. 다른 말로 하면 바리새인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부정적 의미에서의 바리새가 아니라, 전 우주의 보편법을 가르는 핵심 구동축으로서의 축소형 동사들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다시 말하면 십계명의 준수가 어려운 것은 기독교이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 아니라, 지극히 ‘보편’이기 때문에 어렵다는 역설이다.

십계명이 십‘계명’이 아니라 한 이유가 여기있다.
십계명을 담은 출20장의 시작 절을 유의하면,

“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ㅡ”

이 문장은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매우 다듬은 문장이다.
사실 본래는 이런 어색한 표현이다.

“…이 모든 말로 말하여 말하시되…”

말로 말하여 말을 한다…..??
이게 말이 되나?
이것이 바로 ‘계명’이라는 법정적 뉘앙스로 번역할 수 없는 ‘다바르’(말씀)의 의미이다.

이 문장의 난해함을 쉽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가령, 미주로 노동 이민을 간 1세대 한인 노동자들은 자신의 2세들이 미국공립학교를 다녀오고 나면 한국어 학교를 또 보냈는데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 한국말로 “엄마/아빠 사랑해요.” 라는 말을 듣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2세들로서는 죽을 맛이었다는데(써먹지도 못하는 말을 배우려니). 이 일화에서 작용을 일으키는 ‘한국어’가 바로 말씀/다바르의 진정한 의미이다.

아쉐레트 다바림(다바르의 복수) 즉 “10개의 말들”이란, 어떤 ‘법’도 아니고, ‘히브리어말’/그리스말’/’한국말'(인종적)이란 소리도 아니고, 그것은 한 마디로 ‘아버지의 말’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이 다바르(דָּבָר)를 ‘아버지가 겪은 일(matter/thing)’로도 번역하는 것이다. (Cf. 창 21:11; 22:1)

또한 그렇기에 이 아쉐레트 다바림(עֲשֶׂ֖רֶת הַדְּבָרִֽים)을 셉투아진트로 번역할 때도 ‘십계명’이라 하지 않고 데카 로구스(δέκα λόγους)라 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데칼로그로서 ‘십계명’의 진수이다. 신명기에서는 데칼로그를 두 계명으로 줄이려는 시도가, 마태복음에서는 그 두 계명을 다시 한 계명으로 줄이려는 시도가 있었다. 신약성서에서는 이 데칼로그로 확장된 셀 수도 없이 많은 율례에 대해 다시 축소하는 작업을 성전정결로 간주하는 경향성을 보인다.

◎ 참조할 성서일과: 출애굽기 20:1~17. (시편 19; 고전 1:18-25; 요 2:13-22)

◎ 참조할 십계명 관련 글들

십계명은 왜 두 돌판인가 (신 9:6-14)

기독교 십계명과 불교 십계명(십중계) 차이 알아두기

2016 사순절 (3/40) 알라≠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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