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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기독교 계명이 다른 계명과는 어떻게 다른지를 약술한 글이다.

십중계와십계명001

보편성

계명이나 계율이 기독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불교에도 기독교의 십계명과 꽤 흡사한 십중계(十重戒)라는 것이 있다. 유교에서 비롯된 충·효·예의 경우는 내세(來世)가 있는 강제 법령은 아니나 우리 사회 통념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친다는 점에서 이 역시 계명의 요소를 띠고 있다 하겠다.

특히 불교의 십중계는 위 표에서 보다시피 기독교의 십계명과 상당 부분 비슷하다. 아무런 역사적 연관성이 없는데도 둘은 비슷하다. 자유주의 신학자나 생태/환경 신학 하는 부류들이 둘 간의 연관성에 주목하는 경우도 있지만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이는 인간이 사회와 체계를 이루는 ‘보편성’의 단서일 뿐이다.

하지만 기독교의 계명은 다음 다섯 가지, ‘법’, ‘명령’, ‘계시’, ‘약속’, ‘영원성’ 면에서 현저히 다르다. 기독교인은 이 다섯 가지 특질을 반드시 유념할 필요가 있다.

법으로서 계명

기독교의 계명이 다른 계율과 현저히 다른 점은 우선 그것이 법(法)이라는 사실을 들 수 있다. 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당장에 죄(罪)가 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불교식 카르마와는 다른 명백한 것이다. 불교에서는 죄라는 말보다 ‘업’(karma)이라는 말을 선호한다. 현실을 자극하지 않고 카르마에게로 돌리는 것이다.

‘흠 있는 자는 사제가 될 수 없다’라는 법령이 있다고 했을 때(레 21장) ‘흠’이란 죄로 간주된 어떤 것들이다. 그런데 그것은 윤리적 범주 이상의, 여성 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신체 장애를 지닌 사람까지 그 ‘흠’에 포함한다. 그것은 단순한 차별이 아니다.

그것은 ‘죄’라는 개념이 운명 카르마까지 소급하고 들어가 압도해버리는 엄정한 법의 속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계명’을 이 무지막지한 법 개념으로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고수하는 교단/교회도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전혀 변화 받지 못한 조폭이나 전과자, 고문 기술자, 아내 두들겨 패는 연예인까지 목사로 부를(calling) 정도로 법이 붕괴된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

명령으로서 계명

두 번째 차이점은 ‘명령’으로서의 계명이다. 불교의 십중계(十重戒)와 기독교의 십계명(十誡命)에서 서로 다른 한자 ‘계’가 공교롭게도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아래와 같이 그 용례를 참조하면 그 명령 강도가 좀 다르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불교의 십중계에 쓴 계(戒)의 용례는,
1. 경계하다(警戒–), 막아 지키다, 경비하다(警備–) 2. 조심하고 주의하다, 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3. 타이르다, 알리다 4. 이르다, 분부하다(分付ㆍ吩咐–) 5. 재계하다(齋戒–) 6. 이르다.
반면 십계명의 계(誡)의 용례는,
1. 경계하다(警戒–) 2. 고하다(告–) 3. 분부하다(分付ㆍ吩咐–), 명령하다(命令–) 4. 훈계하다(訓戒–) 5. 경고(警告), 경계(警戒) 6. 교령(敎令: 임금의 명령(命令).

후자가 훨씬 명령의 강도를 세다.

한편, 유교에서도 충(忠)이라는 개념이 있지만 이 역시 기독교 계명의 ‘명령’과는 다른 것이다. 기독교 계명은 보다 격상된 신적 명령에 응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던 행위를 예로 들 수 있다. 그것은 미개한 인신 번제로서가 아니라 받들지 않으면 안 되는(God’s Imperative) 하나님 명령의 예이다. 그 명령을 잘 표현한 영어 문장이 있어 참조한다.

No Ifs, Buts, or Maybes … God’s Imperative
(‘만약에’도 아니고, ‘그러나’도 아니고, ‘아마도/어쩌면’도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절대 순명!)

계시로서 계명

세 번째로 중요한 차이점은 ‘계시’라는 사실이다.

마음에 맞는 몇이서 ‘이게 좋겠다ㅡ’ 해서 만들어낸 조문이 아니라, 지구 바깥 누군가로부터(초월적 존재로부터) 받은 계명이라는 것이 기독교 계명의 차이점이다. 모세는 자기가 받은 계명을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직접 써주신 것이라고 하였다. 예언자는 환상이나 꿈을 통해 받은 말을 전하되 하나님의 입을 그의 입이 ‘대신’했다.

개신교는 오직 성서의 말씀을 제1 계시로 삼는다. 이를 초월할 수 있는 계시란 없다. 어떤 이단들의 흔한 교설처럼 어느 날 땅속을 파보니 책이 있더라ㅡ는 계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약속으로서 계명

네 번째로 다른 점은 기독교의 계명이 ‘약속’이라는 사실이다.

기독교 밖의 일반적인 규범과 율례는 대개 그것을 준수하는 자신이나 그 자신이 포함된 세계에 이로운 준칙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계명은 ‘하나님의 뜻’에 의거한 쌍방 간의 약속이다. 그리고 그 약속의 주된 내용은 복(福)이다. 오늘날은 복의 의미가 퇴색한 나머지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했지만 약속의 내용이 복이 아니고 그러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목적에 부합하면(준수하면) 복에 이른다는 약속이지만, 반대로 준수하지 못하면 복에서 멀어진다. 그것은 이제부터 저주를 퍼붓겠다는 의미가 아니다. 복을 걷어내자 가시와 엉겅퀴에 그대로 노출된다는 의미이다.

계명의 영원성

이런 네 가지 토대 ㅡ 법, 명령, 계시, 약속 ㅡ 속에서 예레미야가 말하는 ‘새 언약’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약속을 근거로 하나님께서 마침내 나타나신 것이다. 모든 복을 준행하지 못함으로써 나라도 빼앗기고, 성전까지 더럽히고 파괴되고 말았는데.., 그래서 그 백성의 의지까지 모두 박약해져 있는 상태였는데, 바로 그 약속을 근거로 마침내는 하나님께서 다시 나타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약이 강제적인 이유. 참조 글: 계약은 왜 강제적인가?)

그래서 새 언약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것을 다 무시한 채 전혀 엉뚱한 새로움이 나타나는 게 아니라, 과거의 약속을 토대로 한 ‘기억’이라 할 수 있다. 노아 가족이 방주에서 목숨은 건졌지만 물이 감하여 퇴선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기억’하셨기 때문이다(창 8:1).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이 그 약속을 ‘기억’하셨기 때문이다(출 2:24).

약속한 것이 없는데 어떻게 기억을 하겠는가.
그래서 약속/계약과 ‘기억’은 동의어나 마찬가지이다.
(계약 = 기억)

왜냐하면 이 기억 속에서 ‘영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생이라고 하는 것은 진시황제의 불로장생 개념이 아니라 기억과 약속(계약)에 의거한 영원성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의 육신이 영.원.한. 계약에 들러붙어 있기 때문에 영생하는 것이다.

새 언약으로서 계명의 형식: 내 법을 그들의 속에

그런데 그 ‘새 언약’에 이르러서는 이 법/계명이 우리 속(마음)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렘 31:33).

더 이상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하나님을 다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렘 31:34).
이 ‘안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대개 우리는 자라날 때 아버지에게서 하나부터 열까지 배운다. 그것은 십계명/십중계와 같은 강한 금제일 수도 있고 아니면 충·효·예의 유연한 훈계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당신께서 돌아가시고 내가 혼자 되었을 때 그것은 마음에서 들려오는 어떤 음성으로서 법이다. 아버지가 내 안에 있는 것이다.

변변한 육친의 아버지를 못 만난 예외의 사람들은 어떨까? (슬프게도 현대 사회일수록 그런 사람이 많다) 오히려 폭행만 일삼는 아버지도 있다. 하지만 그랬을지언정 피해자인 그가 어엿한 아버지(어머니)가 되어가고 있다면 그 마음 안에는 분명 아버지로서 어떤 음성이 들린 것이다. 그 음성이 없었다면 그는 결코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못 된 아버지에게서 못 된 아버지가 난다는 것은 세속의 가르침이다. 그런 자는 아버지가 없는 게 아니라 마음에 들려오는 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참된 아버지·어머니가 된 것은 학습으로 된 것인가? (십중계 식) 계명으로  된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준 법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내면에 기록된 ‘내 법’의 예시이다.

십계명

새 법의 실현, 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예수께서는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하셨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르기를 “계명에서는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반문하였다(요 12:34-35).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그가 사람들을 이끄는지를 몰랐던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면서 ‘안다.’
과연 그것을 배워서 알 수 있었던가?
그냥 아는 것이다.
내 마음에 심긴 ‘법’으로.

(믿음도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다. 타고나는 것이다. 믿음을 배우는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

위와 같은 일련의 모든 것들이 다른 계명과는 다른 기독교 ‘계명’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사순절 5주차 | 성서일과─렘 31:31-34; 시 51:1~12; 히 5:5~10; 요 12:20~33. (2015-03-22. 내 법을 그들의 속에)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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