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신학, 언약신학─계약은 왜 강제적인가?

종말, 영생, 은사, 축복, 하나님 나라… 다양한 기독교 신앙 주제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약속’이라는 개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예수’라는 이름보다도 중요하다. 약속과 분리된 예수는 다른 예수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약속을 자꾸만 잊는 이유

신약·구약, 약속을 책으로 엮어 들고 다니는 우리가 이 약속이라는 개념의 중요성을 자꾸만 잊어버리는 이유는 성서 번역 과정에서 그 (약속의) 구속력이 상당히 풀어졌기 때문이다.

‘베리트’라고 불리는 이 약속의 개념에서 가장 적절한 빠롤은 ‘계약’이다. 구속력에 탄력을 다시 부여하는 어휘인 까닭이다. 그럼에도 우리 마음속에 더 보편적이면서도 포괄적인 용어로 ‘약속’ 혹은 ‘언약’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그 강제성을 순화시키려는 성서 번역자들의 배려일 수도 있고, 그 강제를 싫어하는 독자인 우리 자신의 착시 일 수도 있다.

왜? 계약은 언제나 법정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지만 그렇기에 그것은 언제나 문서 곧 텍스트를 수반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계약의 두 기원

이 중차대한 ‘계약’이라는 말의 원래의 문장 형식은 생소하게도 “계약을 자르다”(cut a covenant)였다. 뭘 잘라? 왜 잘라?

이 ‘자르다’에 대한 견해를 두 가지로 추릴 수 있다.

우선, 베리트(계약)가 바라(식사; barah/먹다)에서 온 말이라고 보는 견해이다. 그래서 그것은 ‘계약’의 개념을 정의할 때, 계약이 수반된 어떤 ‘식사’라고 본다(L. Kohler).

반면 ‘자르다’는 행위를 동물 사체를 반으로 자르는 행위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Noth). 고대 문서에 나타난 계약 풍습을 추적한데 따른 판단이다. 예컨대 계약 체결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썼다고 한다.

“‘하누’와 ‘이다마라스’ 사이에 나귀를 살해한다”
(to kill an ass between the Hanu and Idamaras)

고대 근동에서는 계약을 체결할 때 어린 나귀나 당나귀를 죽인 다음 그 사체를 둘로 갈라 마주 대하여 놓고서 계약자 쌍방이 그 사이를 같이 걸어 지나가는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B.C. 2000년대 당시의 종주권 조약에 상당한 형식으로서 종주국이 속국에 계약을 제시하면 속국은 그 계약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나, 여기서 종주국은 자신의 힘에만 근거하지는 않는 태도로 나타나며. 속국에 대한 자신의 자비 행위를 회상시킨다는 사실을 밝혀냈다(Mendenhall).

계약?

계약의 두 개념 중 무엇이 맞나?

전자 곧 ‘식사’에 기원을 둔다면 ‘친교’와 연장된, 신사적인 의미로서 우리가 받아들이는데 가장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베리트(계약)는 일방적이며 동등하지 않은 관계를 갖는 것처럼 성서에서 읽히기도 한다. 모세 계약에 가서는 확실히 그러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받아들여야 하는 계약의 기원과 개념은 단지 복종과 충성인가? 절대 종주국인 하나님에게 무조건 순종하라는 의미에서 이 계약의 기원이 교차하는 건가?

그런 것이 아니다.

피로 맺은 그 베리트(계약)가 초월적 권한을 지닌 ‘강한 자’의 일방적 요청에 기초를 둔 진정한 이유는 바로 ‘사람의 동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계약이라는 사실에 기반 한다.

이런 계약의 위력이 언제 발생하느냐?!

우리가 완전히 파괴되었을 때,
우리의 멘탈이 완전히 붕괴되었을 때,
그래서 자력으로는 도저히 헤어 나올 수 없는 바로 그 지점에 다다랐을 때이다.

그런 상황에서 ‘약한 자’가 어떤어떤 약속을 떠올릴 수 있다고 믿는 건 실로 낭설이 아닐 수 없다.
그때는 오로지 ‘강한 자’, 즉 신성한 그 절대 주권자만이 그 계약을 다시 불러내 복원시킬 수 있다.

이것을 이른바 God’s Imperative라고도 부르는 것이다.

이는 모든 예언자들 및 계시의 수령자들의 발화지점이기도 하다.

에필로그

흔히 현대 기독교인들이 행하는 <구원의 확신>이라는 개념이 있다.
자신에게 ‘구원의 확신’이 있으면 구원을 받고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개념이다.

그런 얄팍한 단답식의 ‘구원의 확신’은 사실 구원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현대식 해악일 뿐이며, 구원은 오로지 하나님의 신성한 주권적 요청(God’s Imperative)에 의해서만 그 약속으로 불려나올 수 있다는 이 베리트 개념만이 굳이 ‘구원의 확신’이라면 ‘구원의 확신’일 수는 있겠다.

The Calling of Saint Matthew (1599-1600), Caravaggio


YOUNG JIN LEE李榮振 | Rev., Ph. D. in Theology. | Twtr |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 파워바이블 개발자 | 저서: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 (2017), 영혼사용설명서 (2016),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 (2015), 자본적 교회 (2013), 요한복음 파라독스 (2011). 논문: 해체시대의 이후의 새교회 새목회 (2013), 새시대·새교회·새목회의 대상 (2011), 성서신학 방법에 관한 논고 (2011). 번역서: 크리스티안 베커의 하나님의 승리 (2020). | FB | Twtr | 개인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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