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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는 인간의 삶을 ‘여정’(Living a Nomadic Life)의 한 양상으로 정의하는 방식의 원형이다.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는 지엽적이지만 그들의 선조가 광야에서 남긴 종교적 의미는 오랜 세월 보편화 단계를 거쳤기 때문이다. 그들의 광야 생활 40년에서 가장 극적인 고난의 순간이 담긴 장면은 민수기 21장 4-9절일 것이다. 20장부터 이어져 온 고통스러운 상황의 귀결이 위로와 보상보다는 불순종의 전형으로 표본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천국과 지옥의 기로에서: 홍해는 더 이상 기적의 상징이 아니야

당시 이들이 겪은 상황은 다음과 같은 간명한 문장에 잘 보전되어 있다.

백성이 호르 산에서 진행하여 홍해 길로 좇아 에돔 땅을 둘러 행하려 하였다가 길로 인하여 백성의 마음이 상하니라

민 21:4

미리암은 얼마 전에 죽었다(민 20:1). 아론도 죽었다(민 20:29). 미리암이 누구인가? 홍해를 가를 때 믿음의 선봉에 섰던 여장부였다(출 15:20). 아론은 누구인가? 모세의 입이다. 이들의 죽음은 이스라엘 백성의 세대 교체를 의미했다. 낙원을 두 발로 밟기를 꿈꾸며 길을 떠난 첫 세대가 사라져가는 현실을 의미했다. 그뿐 아니라 낙원으로 향하는 직선 거리인 세일을 가로지르는 길을 포기하고 황량한 가데스 방향으로 우회해야만 했다. 지름길을 내주지 않는 에돔족과의 전쟁을 형제 민족이라는 이유로 율법이 금했기 때문이다(신 2:1-19). 이렇다 보니 홍해는 더 이상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보호한 표징이 아니다. 이제는 험준한 ‘길’의 상징일 따름이다. 다른 말로 하면 과거의 기적은 더 이상 신비롭지 않다!

그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심정을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였다.

“길을 걷는 동안에 백성들은 마음이 몹시 조급하였다.”

공동번역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길을 가는 동안 백성들은 참지 못하고”

그러나 마음이 몹시 조급한 것도 아니며, 참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상한 마음, 틱차르

“상하니라”는 카차르의 미완료 틱차르(תִקְצַר‎)를 번역한 것인데, 계속해서 짧아지는 상태를 말한다. 마음이 계속해서 짧아진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왜 마음이 상했는지를 통해서만 알 수 있다. 앞서 말한 대로 받다레크(בַּדָּֽרֶךְ), ‘길’ 때문이지만, 받다레크는 단순한 길이 아니다. 고대어의 정관사는 그 명사를 현대어 정관사보다 강하게 주도한다. “그 길!”

과거 홍해를 가른 영광의 길이었는지는 몰라도 대미를 장식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지금의 그 길은:
미리암이 중도에 죽고만 길,
동고동락하던 맏형 아론도 객사한 길,
에돔이 형제라 하여 돌아갈 것을 주문한 하나님이 인도하는 바로 그 길!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 이것이 바로 ‘그 길’의 실체이다.

광야 생활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이 지점에서 ‘마음이 짧아졌다’는 표현 틱차르(תִקְצַר‎)는 ‘숨이 (턱에 차도록) 짧아졌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네페쉬-하암’은 ‘백성의 숨’이란 표현이기 때문이다. 멋지게 종결됨이 마땅한 시점에 도리어 광야로 ‘돌아가야 했던’ 터에 숨이 차올랐다.

위로가 아닌 불 뱀을 보낸 하나님

숨이 좁혀져 차오르는 이 순간에 하나님이 보낸 것은 위로가 아니라 불 뱀이었다. 원망과 불평으로 많은 사람이 불 뱀에 물려 죽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모세에게 구조를 요청했고 하나님은 ‘불 뱀’을 만들어 나무에 달아 그것을 쳐다보게 함으로써 해독의 방도를 주었다는 이야기로 끝나지만, 이 단화에서의 ‘불 뱀’은 다양한 시대에 다양한 이해로 재형되었음이 성경에 담겨 있다.

가나안 컬트. 어떤 사람은 이것이 가나안 컬트였다고 말한다. 이때 모세가 만들어 매단 것이 ‘놋뱀’이다. 불 뱀을 놋으로 만들어 매단 것이다. 불 뱀이라고 번역된 sa-ra-ph(שָׂרָף)는 한글 성서에서 약 5회 나온다. 불 뱀(fiery serpent)뿐 아니라 날개 달린 뱀(winged serpent) 혹은 여섯 날개 달린 신화적인 뱀(six-winged creature)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렇다 보니 이 (놋)뱀이 고대의 컬트에서 유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당시 가나안에는 뱀 컬트가 일반적이었기 때문이다. 성서 전반에 걸친 뱀에 관한 혐오와도 배치되는 것도 문제이다.

심리적 기제. 어떤 사람은 심리적 기제에 따른 현상으로 보기도 한다. 프로이트의 용어 중에 양가적(兩價的, ambivalent)이라는 개념이 있다. 뱀이 독과 해독의 매개로 변모한 것처럼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이해는 이처럼 양가적 양상을 띤다는 것이다. 이는 ‘이중적’이란 말과는 다르다. 부모에 대한 감정이 대개 양가적으로 분열되듯이 하나님 얼굴의 변모는 인간(또는 자식)이 갖는 인식의 변모에 기반한 것이지 그 대상이 ‘이중적’ 실체인 것은 아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보내신 불 뱀’이란 불순종을 표지하게 된다. 이는 마치 처음 낙원에서의 선악과에 기어오르는 뱀의 도상이 하나님의 이중성이 아니라 인간의 양가성, 즉 불순종을 표지하게 된 원리이다. 하지만 심리학은 이론을 장착한 현대적 컬트에 불과하다.

컬트와 심리 기제의 파괴. 놋뱀에 얽힌 이해의 정수는 이것이다. 그것은 컬트와 심리, 양자 모두에 대한 파괴에 있다. 하나님이 장대 위에 매달라고 한 것은 시종일관 세라핌(שָׂרָף)이었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불 뱀’을 보냈다고 했을 때 불 뱀이 ‘하네카쉼 하세라핌’이었다면 모세에게 매달아 내걸라고 한 것은 나카쉬가 빠진 ‘세라핌’이었다. 나카쉬는 뱀이요, 세라핌은 불이다. 그래서 나카쉬(뱀)보다 중요한 것이 ‘세라핌’(불)이다. 영적인 지적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세라핌이 천사(스랍)로도 번역되는 원리이기도 하다.

이에 반해 백성은 자신이 뭐에 물어 뜯긴지도 모른다. 영적으로 무지하다. 세라핌(스랍)에 물려 뜯기고도 나카쉬(단순한 뱀)에 물린 줄로 안다. 이때 의미를 알아차린 것은 오로지 모세뿐이다. 불 뱀(세라핌)을 내걸라 하였을 때, 내 건 나카쉬 네호쉐트(נְחַ֣שׁ נְחֹשֶׁת)의 놋은 문명과 문화를 상징한다. 놋/청동기는 환금 가치로는 금을 대신하며, 금속 가치로는 최고의 무기인 철기를 대신한다는 점에서 세속 문화의 출발점이다. 놋뱀은 어떤 마술로서 임한 것이 아니라, 모세의 탁월한 이해를 반영한다. 우리가 장대에 걸고 분쇄해야 할 대상은 바로 놋, 현세의 거대한 리워야단인 셈이다. 이 놋뱀, ‘네호쉐트’가 훗날의 리워야단인 ‘느후스단’이다. 현대적 용어로는 리바이어던. 실제로 히스기야는 이 컬트와 문화를 분쇄하였다(왕하 18:4).

따라서 사람을 물어 죽이고 신음하게 만든 도상 속의 불뱀은 하나님이 보낸 악(惡)이라기보다는 세상 풍속으로 대변된 ‘놋’에 중독되어 죽고 신음했던 이스라엘을 반영한다. ‘홍해는 더 이상 기적의 상징이 아니다.’라는 무신론의 중독을 의미한 것이다.

당시 이들의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부연할 필요가 있다. 광야, 곧 자신의 길로─ 지정된 운명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였을 때이다.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한” 이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린 일용할 양식을 가리켜서도 “이 하찮은 음식이라” 하였다(민 21:5). 현재의 자기 밥그릇을 하찮게 여기는 바로 그것이 불 뱀의 문화이다. 불 뱀 느후스단이라 불리는 이 문명이 우리에게 스며들어 영혼을 물어 뜯고 좀 먹는 이치이다. 이는 위로를 받아도 부족한 백성에게 하나님이 불 뱀을 보내신 게 아니다. 먹지 말라했던 선악과를 먹게 하기 위해 뱀을 보낸 것이 아니었듯이.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따라서 다음과 같은 요한의 통찰은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요 3:14

‘들린’(매달린) 인자를 ‘놋의 문명’, 즉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 권세 잡은 자를 따르던 자들이 숭앙했던 그 ‘놋 뱀’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엡 2:2). 다른 말로 하면 인자야말로 참되게 ‘공중 권세를 잡은 자’가 되었다.

모세의 ‘놋뱀’으로 재형된 리워야단은 에덴 동산의 지식 나무를 기어 올라갔던 바로 그 ‘옛뱀’이었을 것으로, 종말에 와서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지식나무 곁에 있던 생명나무로 올라가 달림으로 해독되었다는 것이 ‘놋뱀’에 관한 요한의 도상해석이다. 요한은 이것이 ‘들림’(인자가 들려야 하리니) 곧 휴거의 진정한 의미라 지적하였다. 놋뱀에 무지한 종말론자들이 ‘휴거’(성경에 나오는 말이 아니다)를 마치 우주선(구름이라 명명했을 것이다)의 자기장으로 이해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고도화 된 천상에 관한 이해가 아닐 수 없다.

다만, 모세의 놋뱀이 컬트로 오인 되었듯이 십자가와 이어진 이 천상의 가치가 몇 가지 오해에 싸여 있다.

천국과 지옥은 어떤 곳인가

첫째 모세가 승천하였다는 사상이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 1:9)은 이런 사상의 편린이다. 1세기의 이런 유대 사상은 엠페도클레스와 같은 헬라 철인의 구원론과 결합하여 천국을 관념의 세계로 전락시켰다.

둘째 천국과 지옥의 중간 단계를 그려 넣는 사상이다. 이 사상은 ‘광야’를 인간 삶의 여정을 넘어 사후의 세계(死後世界)에까지 상정한 나머지 정화의 한 단계로 정형화된 교리를 낳았다. 파라디소(천국)와 인페르노(지옥)의 중간 단계인 푸르가토리오(연옥)에서의 정화 가능성을 말하는 연옥설이 그것이다. 인페르노의 형벌보다는 약한 처벌을 통해 파라디소에 이를 수 있다는 이 신화는 돈을 주면 죽은 상태에서 속죄될 수 있다는 면죄부를 양산했다.

셋째 천국과 지옥의 중간 단계인 연옥(푸르가토리오)설은 버렸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면죄부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지옥은 고문하는 공간이요, 천국은 환락의 처소라는 이슬람교를 능가하는 교리가 기독교의 이름으로 활보하는 것이다. 일부 개신교도조차 이런 교리를 신봉한다. 이는 연옥설의 푸르가토리오를 현실로 옮긴 교설일 뿐이다.

천국과 지옥은 이런 차이이다.

70인역은 ‘상한 마음, 틱차르’ 즉 이 ‘짧아져 들어가는’ 상태를 작은(ὀλίγος)이라는 형용사에서 온 부정과거 동사(ωλιγοψύχησεν)로 옮겨 놓았는데, 그 바람에 이 장면의 본질을 꿰뚫는 보다 명확한 표현이 되었다.

이 올리고스(ὀλίγος)가 들어간 예문 하나를 소개하면 이런 것이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좁고 협착한 길은 달동네 옥탑방이나 술집이 즐비한 슬럼가가 아니다. 바로 되돌아가야 하는 “왔던 그 길”을 의미한다. 바로 이 때 사람 수가 적어진다는 것이다. 이 적어지는 올리고스(ὀλίγος)가 바로 틱차르(תִקְצַר‎) 즉 짧아져 들어가는 마음이다. 여기서의 마음은 Mind가 아니라 네페쉬/영혼을 말한다. 기분이 잡친 정도가 아니라, 영혼이 상한 상태를 말한다.

또한 이 틱차르는 추수할 때 곡식을 베는 상황이기도 하다. 곡식 줄기가 짧아져 들어가는 까닭이다. 우리가 추수당하는 지점이 바로 ‘그 길’인 셈이다. 되돌아 오게 된 그 원점 말이다. 따라서 이 얼마나 아름다운 표현인가.

길로 인하여 마음이 상하니라…

이 마음의 너머에 천국이 있기 때문이다. 천국을 목전에 두고 인도하는 길목인 셈이다.

따라서 천국은 고문(Inferno)과 정화(purgatorio) 다음에 오는 환락(Paradiso)의 장소도 아니요, 현실을 재촉하는 플라토닉한 관념의 추인 장치도 아니요, 그렇다고 칼 막스의 사생아들이 꿈꾸는 지상 천국도 아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사순(Lent)의 여정이 종결되었을 때 마땅히 하늘에서 내려 오는 십자가 앞 ‘들림’의 자리이다. 지옥은 여기에서 벗어난 모든 지역의 명칭이다.

천국과 지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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